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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북 면(上北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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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작성일 2004-03-27
상 북 면(上北面)


면의 위치와 자연
상북면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최서단에 위치한다. 백두대간의 낙동정맥(洛東正脈)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에서 솟구쳐 1천m급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영남의 지붕, 영남의 병풍, 혹은 영남의 알프스라고 하며, 특히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북면은 울산시가 경상북도 청도군·경주시, 그리고 경상남도의 밀양시·양산시와 경계를 이루는 접경지역이 되면서 영남알프스를 형성하는 독특한 산악군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뛰어난 산악지형은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 불교가 성행하게 하였고, 가슬갑사, 간월사, 동인암, 석남사 등 신라 고찰이 자리를 잡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북쪽은 경북 경주시 내남면·산내면,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접하고, 동쪽은 울주군 두서면·언양읍과 접하며, 남쪽은 울주군 삼남면, 경남 양산시 원동면과 접하고, 서쪽은 경남 밀양시 단장면·산내면과 접하고 있다. 면의 서남쪽은 낙동강으로 흐르는 단장천의 상류가 되고, 가지산 일대의 물은 태화강으로 흘러든다. 상북면은 울주군 12개 읍·면 중 가장 면적이 광대하여 인근 삼남면의 다섯 배에 달한다.

면 이름의 유래
상북면(上北面)이라는 이름은 옛날 상남면(上南面)의 ‘상(上)‘과 하북면(下北面)의 ‘북(北)‘자를 합한 절충식 합성지명이다. 이 지역은 면치(面治)의 변천이 다소 있었으나 이를 알려주는 자료가 빈약한 실정이다. 1864년에 나온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이 지역에 상남면을 두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1899년(광무 3)판 {언양읍지}에는 하북면(下北面)과 상남면으로 갈라져 있음이 나타난다. 그 후 일제 때인 1928년 4월 1일 하북면과 상남면을 합하면서 지금의 ‘상북면‘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면의 연혁
울주군 12개 읍·면 중의 하나이다. 상북면 길천리 지화(知火)는 변진 24국 중의 하나인 기저국(己 國)이 있었던 곳이라는 학설이 있다.
그 후 신라 초 이 땅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어 지화에 치소를 두었다가, 경덕왕 16년에 언양읍 쪽으로 옮겨갔다.
1899년(광무 3)에 나온 {언양읍지}에는 하북면과 상남면으로 나누어, 하북면은 지내(池內)·능입(陵入)·산전(山前)·수피(禾皮)·석남(石南)의 5개 리를 관할하였고, 상남면은 양등(楊等)·거리동(巨里洞)·길천(吉川)·명촌(鳴村)·등억(登億)·천전(川前)·이천(梨川)의 7개 리를 관할한 것으로 되어있다.
1928년 1월 28일 경상남도령 제1호에 따라 동년 4월 1일부터 하북면과 상남면을 합쳐 상북면(上北面)이라 하였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두서면의 소호리(蘇湖里)를 편입하였다. 현재 13개 법정동리와 21개 행정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이 지역이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 접해 있으며,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선생의 천도교가 맨 먼저 포교되어 정착하였고, 그 천도교인들이 언양고을의 기미년 3. 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거리(巨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거리동을 거리(巨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8년 4월 1일부터 상남·하북 양 면을 합하여 상북면이 됨에 따라 그 관할이 되었다. 행정마을도 거리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이 곳을 토박이말로 ‘엥기‘라고 부르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거리‘는 냇가를 뜻하는 ‘걸‘의 음전(音轉)에 의한 차자(借字)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매쏘, 가매쏘골, 가매쏘골 폭포
거리의 지곡 서남쪽에 있는 가마처럼 생긴 소를 가매쏘라 한다. 이 골짜기에 있는 폭포를 가매쏘골 폭포라 한다.
가지바골:애장터:채봉터
거리 오산들 남쪽 골짜기이다. 애장터(아이를 매장하는 곳), 또는 채봉터(가매장하는 곳)라고도 한다. 여기서 ‘가지‘는 ‘가지 말라‘는 말의 준말이다.
간창(澗倉)
거리 하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큰 부자가 냇가에 창고를 세웠다 한다. 그러나 상남면의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므로 ‘간창‘이라 부른 것이다. ‘사창‘이란 조선후기 구휼기관의 하나로서 각 면마다 하나씩을 두었던 관창(官倉)이다. 양곡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춘궁기에 방출하며 가을에 거두어 들였다. 그러므로 ‘간창‘은 사창이 있었던 물가마을이라는 뜻이다.
간창 마을 뒤에 도굴된 고분을 포함하여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대문각단
거리의 간창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부자 오씨가 살면서 이 곳에 대문을 지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도삼:도솔암터(兜率庵-)
거리의 꿀덤 서쪽 골짜기로 옛날에 도솔암이 있었다. ‘도삼‘은 ‘도솔암‘의 방언형 준말이다.
동뫼산:밀양산(密陽山)
거리의 하동 앞에 있으며, 길천리 오산의 뒷편이 되는 곳에 있는 조그마한 야산이다. ‘동뫼‘는 마을 산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이며, ‘독뫼산(獨山)으로도 쓰고 있다. 밀양에서 온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울산에 성을 쌓는 큰 부역이 있어서 밀양 사람들도 징발하여 성을 쌓았다. 이 축성공사는 부역이 과중하여 항간에 큰 원성이 일어나고 백성들의 고통도 매우 컸다. 이 때 밀양의 마고 할미가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주려고 밀양땅의 흙을 치마에 담아 거리의 하동까지 왔는데, 울산의 성역(城役)이 이미 끝나버렸다. 그러자 마고할미는 치마폭에 가져 온 흙을 이 곳에 버려 두고 가버렸다. 그 흙더미가 산이 되었으니 이름을 ‘동뫼‘ 또는 ‘밀양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른 설화도 있다. 지화에 세거하던 정심(鄭諶)의 후손이 동뫼에 장사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뫼는 마을에서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금장지(禁葬地)였다. 이에 꾀를 내어 밀양부사에게 산세(山稅)를 내고 매장허가를 얻어 그 산에 장사를 지냈다. 밀양산이라는 말은 이렇게 하여 생겨 났다 한다.
밤갓:율동(栗洞)
거리의 하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밤나무 갓(산)이 있는 마을이므로 밤갓이라 부른다. 갓은 숲 또는 야산을 부르는 말이다.
불당골(佛堂谷)
거리의 지시골(芝谷)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도삼사(都森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불당골이라 부른다.
선드미:선덤방우
거리(巨里)의 처마드미 서쪽에 있는 바위로 우뚝 서 있다.
숫것등
거리의 선등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에 숯을 구웠다.
양달
거리의 지곡에 있는 자연마을로 마을이 양지쪽에 있다.
어성들(於城坪)
거리(巨里) 간창에 있는 들이다. ‘어(於)‘는 늘어짐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성‘은 새김이 ‘재‘이며, 재는 산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성들은 재가 늘어진 들을 뜻한다. 이 곳에 어성못(於城堤)이 있다.
영사재(永思齋)
거리(巨里)에 있는 유씨(柳氏)들의 재실이다. 언양 입향조인 유혜지(柳惠至)의 처 동래정씨는 남편이 세상을 뜨자 3년간 시묘하여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능산 입구에 열녀각이 서 있다.
오두산(鰲頭山)
거리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높이 82.3m로서 오두미기 또는 오두막재라고도 한다. 산세가 자라(鰲) 모양을 하고 있다. ‘미기‘는 ‘목(項)‘이 변한 말이다.
오산보(吾山洑)
거리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농사를 짓는 보를 오산보라 한다. 이 보의 몽리를 입는 논은 거리(巨里)와 길천리(吉川里) 까지이다. 옛날에 거리에서는 우리 마을 물이라 하여 길천까지 물을 내려 보내지 않아 물싸움이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송사로 이어졌는데, 두 마을이 10년 동안 법정에서 다투어 길천리의 승소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소송비용으로 거리는 80마지기, 길천리는 70마지기의 논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두 마을이 합심하여 못을 막자고 선도한 사람이 있어 못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산못이다. 이로 인하여 100여 년간의 두 마을 갈등이 해소되었다. 이 공사는 지곡 마을 20여 호가 철거되는 희생도 감수하면서 추진되었다. 제방을 막을 때 망깨를 놓았는데, 그 망깨 소리와 오산평야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망께 선소리
1. 망깨야 어서 하자 너와 나와 인연되어
/ 잠시라도 허술하면 백천만사 허사된다
2. 천지만물 생겨날 때 용시용처 천정이라
/ 화류춘풍 호시절에 우연히 만났도다
3. 이 못자리 정하기로 백천만인 하는 말이
/ 천작이라 청용등은 인작같이 둘렸는데
4. 지곡주민 20여호 무가내라 할 길 없네
/ 이 말씀이 전해오기 50여년 지는 중에…
(이하 생략)

오산평야 노래
1. 태백산 정기받아 오산평야 생겼도다
/ 북쪽에는 가지산, 남쪽에는 화장산
2. 서쪽에는 오두산, 한복판이 독매산
/ 거리 길천 뻗친 들이 천오백 두락 옥토로다.
3. 오산들이 주종인데 양 동민이 합심하여
/ 갑진 6월 초 5일 거리지역 통합하니
4. 하동 앞들 편입되고, 대문 음달 합쳐졌다
/ 오산못줄 삼배수량 거리지구 단독으로…
(이하 생략)

음달
거리의 지곡에 딸린 자연마을로 마을이 음지에 있다.
응봉산(鷹峰山)
거리에 있는 산으로 이 곳에 영사재라는 재각이 있다. 옛날 해일이 일어났을 때 산 꼭대기가 매 한 마리가 앉을 만큼만 남고 모두 물에 잠겼으므로 매봉 또는 응봉산이라 부른다 한다. 그러나 대개 ‘매‘는 ‘뫼(산)‘가 매(새)로 된 경우가 많다.
지곡(芝谷):지소곡:지시골
거리(巨里)의 하동 위에 있는 마을이다. 지곡·지소곡·지시골 등의 이름이 있다. 마을 부근에 지초(芝草)가 많아서 지곡이라 하였다는 설, 혹은 종이를 만들었던 지소(紙所)가 있어서 지소곡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옛날 닥나무를 찍어 종이를 뜨던 곳을 지소 또는 지통(紙桶)이라 하였다. 마을에 닥바실(楮田谷)이라는 들이 있다.
치마디미
거리의 지곡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이 치마를 두른 것처럼 덤으로 둘러있다.
포구남징이
거리의 물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포구나무(팽나무)가 있었다.
하동(下洞)
거리의 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거리(巨里)에서는 아랫쪽에 해당되므로 하동이라 한다. 만당걸의 흐름이 동으로 뻗쳐 있다.
홈방우
거리(巨里)의 곰지골 동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가운데가 홈통처럼 패였으므로 홈방우라 한다.

궁근정리(弓根亭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임이리(숲이리:林伊里), 정조 때는 수피리(禾皮里)라 하여 하북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일제 때인 1911년 우만(于萬)·화촌(禾村)·궁근(弓根)의 세 마을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궁근정리라 하였다. 궁근정리에는 장성(長城)과 궁근정 두 행정마을이 있다.
궁근정은 옛날 이 곳에 화살나무과에 딸린 회나무가 정자를 이루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또는 옛날 활과 살을 만들고 군졸들이 이 곳에서 훈련하였으므로 궁근정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 궁근정을 ‘굵은 정‘(太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곧 이 지역에 굵은 정자나무가 많았으므로 ‘굵은 정‘이라 한 것이 지금의 궁근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곳이 신라시대 군정(軍停)이 있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곧 신라가 이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므로 생긴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운문재 석남재와 함께 이 지역이 경주 도성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므로 군사조직인 ‘정(停)‘을 두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궁근정 주변의 지명들이 뒷받침해 주고있다. 즉 궁근정 앞산의 장성(長城), 활쏘기를 했던 궁평(弓坪), 말을 길렀던 마두배기, 진을 쳤던 흥진(興陣), 연병장이었던 사시야(射矢野) 등 군대와 관련된 많은 지명들이 도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옛날의 궁근정에는 주막도 있었고 객주도 있었으며, 색주가도 있었다 한다. 이 지역이 청도·대구·영천·경주 등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고헌산(高 山)
궁근정리와 소호리, 그리고 두서면, 언양읍 경계에 있는 높이 1,033m의 산이다. 영남의 지붕,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워지고 있는 낙동정맥의 산악군 중에서도 북알프스에 해당하는 산이다. 옛 언양고을을 수호하던 진산(鎭山)이다.
언양의 옛 이름이 ‘헌양( 陽)‘인데, 이것은 ‘고헌산의 남쪽‘을 뜻한다. 지명에서 ‘산 이름+양(陽)‘은 그 산의 남쪽을 뜻한다. 가령 ‘한양(漢陽)‘은 한산(북한산)의 남쪽이라는 뜻과 같다.
고헌산은 높고 큰 산, 신령한 산, 곧 고숭(高崇)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름으로 보며, 고헌산 산신령은 이 지방에서 특히 영험한 신령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 가뭄이 들면 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이 산은 ‘고함산‘으로도 불렸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경북 경주시 산내면 중말에 문복산이 있다. 이 산 중턱에 디린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석이버섯이 많았다. 옛날에 한 젊은이가 동아줄에 매달려 바위의 석이버섯을 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는 커다란 거미가 살고 있어서 동아줄을 물어뜯어 끊으려 했다.
이 때 동쪽 건너편 고헌산에서 나무를 하고있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는 고함을 질러 버섯따는 젊은이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려주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산을 고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 형세는 북녘으로 경주를 향해 뻗었고
물 형세는 동쪽으로 울산바다로 흘러가네

이것은 조선 성종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언양의 동헌에서 고헌산을 바라보며 쓴 시이다.
냉수정(冷水亭):찬물내기
궁근정리 우만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찬물이 많이 나서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였다. 또 정자나무도 있었다. 여기서 ‘내기‘는 ‘나기(生)‘의 뜻으로 본다.
새터:신기(新基)
궁근정리의 서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이 곳에 도굴된 고분을 포함하여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수피:화피(禾皮):화촌(禾村)
궁근정리의 장성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피‘는 ‘숲‘을 길게 뺀 연장음이다. ‘화(禾)‘는 신라·고려를 통하여 ‘수‘로 읽어왔다. 또 ‘피(皮)‘는 숲의 ‘ㅍ‘을 표기하는 음차로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마을을 뜻한다. 한편 ‘화피‘를 벼의 껍질(등겨)로 보고, 궁근정리의 군인 식량을 도정하였던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용샘:용천(龍泉)
고헌산 정상에 있는 샘이다. 옛날에 언양지방에 가뭄이 들면 고을 사람들이 이 산꼭대기의 샘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제관은 부정을 금기하고 목욕재계한 후 용샘에서 하늘에 비를 기원하였다. 비를 다스리는 용신에게 기원하는 곳이므로 용샘이라 하였다.
우만(于萬):우마니
궁근정리의 수피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우마니‘는 우람스럽다는 뜻으로서 이 마을에 힘센 장사가 많이 살아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한편 불가의 우바니(優婆尼:재가 여승)의 전음(轉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곧 ‘우바니‘가 우마니로 전음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또 ‘우만‘은 ‘움안‘ 즉 ‘골짜기 안‘의 뜻으로도 볼 수 있으며, 이두식 표기에 따라 ‘우(于)‘를 웃(上)으로, ‘만‘을 골로 보아 ‘웃골‘로 풀이할 수도 있다.
장성(長城)
궁근정리 새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긴 성(城)이 있었다는 설과 장승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장승배기:장터걸
궁근정리 장성부락 입구로서 운문으로 넘어가는 등짐장수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객주가 있어 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이 곳은 궁근정에 있었던 한 거리의 이름인데, ‘장‘은 시장, ‘걸‘은 거리의 준말이다. 이 곳에 당수나무가 있고, 큰 길가에 장승이 서 있었다. 일제 때 시장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화약고(火藥庫):화약골
궁근정리 고헌산 아래 있는 골짜기이다. 조선말기에 이 곳에서 염초로 화약을 만들었다 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황정자(皇亭子)
궁근정리 남쪽 1km 지점에 흥진이 있고, 여기에서 500m 서쪽에 황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거리 길목에 있었으므로 과거를 보러 가거나 서울로 가는 선비들이 쉬어갔던 곳이라 한다.
그러므로 산전의 궁평과 황정자에는 길손을 위한 주막이나 객주가 성시를 이루었다. 등짐장수들이 청도쪽에서 지고 오는 물건은 과일이나 목기류가 주였으며, 울산에서 가져가는 물건은 소금, 삿자리, 건어물 등이었다.
또 조선말기에는 청도의 운문면 솔개에서 쇠부리를 할 때는 농소읍 달내에서 토철(土鐵)을 태가( 駕)로 실어다 날랐다. 이는 달내의 진득고개-범서읍 용연동-두동면 천전-언양읍 평리 점마을-송낙골-찬물내기-궁근정-운문고개-운문면 점터골로 운반되었다 한다.

길천리(吉川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정조·고종 때도 길천동이라 하여 상남면에 속하였던 오래된 마을이다. 일제초기였던 1911년 상길동(上吉洞)과 길천동으로 나누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다시 합하여 길천리라 하였다. 행정상 지화(知火)·후리(後里)·오산(吾山) 세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길천에 대하여는 따로 설명하였다.
갈미봉
길천리 종자골 위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갈모처럼 생겼다.
갠달:제월(霽月)
길천리 안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쪽 산이 낮아서 마을이 비온 뒤의 달처럼 잘 보였다. 혹은 달이 뜨면 먼저 비추기 때문이라 한다.
갱빈보
길천리의 오산 동쪽 냇가에 있는 보(洑)로 갱빈(강변)에 있는 보를 뜻한다.
골안산
길천리 후리의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골짜기의 안에 있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길천(吉川)
길천은 행화정(杏花亭)의 좋은 물에서 온 이름이라 한다. 신라 때 큰 가뭄이 들어 하천도 우물도 다 말라 물이라고는 없었다. 이 때 재해를 조사하러 다녔는데, 지금의 학교 앞에 이르니 행화정에 물이 솟아 올라 작은 내를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을 길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길천리를 성읍국가 시대의 기저국(己 國)의 치소로 보는 설도 있다. 또 길천이 신라 거지화현의 치소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두로 표기한 이름으로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충북 영동군은 본래 길동현(吉同縣)이던 것을 영동현(永同縣)으로 고쳤다고 했다. 이 때의 ‘길동‘은 우리 말의 긴(길)골로 볼 수 있다. 곧 ‘길‘은 길다는 말을 나타내는 음차표기인 것이다. 이 곳은 태화강의 상류인 만당걸이 길게 뻗쳐 흐르는 냇가의 마을 또는 냇가의 땅이란 뜻으로 보고 있다.
딧말:후리(後里)
길천리의 지화 뒷편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뒤에 있으므로 뒷말, 또는 후리라 한다. 안말과 뒷말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뒷산에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있다.
만당(萬堂)
길천리 이불(知火)의 동쪽에 있는 넓은 들이다.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이 들에 만여 채의 집이 즐비하게 있었다 하여 ‘만당‘이라 부른다.
만당들에는 보습날이나 주춧돌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밭두둑이나 논둑에서는 밤에 불빛이 반짝거리기도 했다.
만당걸(萬堂川)
길천리 앞을 흐르는 태화강 상류이다. 내(川)가 만당들 앞을 흐르므로 만당걸이라 한다.
말무재
길천리 대소무등 서쪽에 있는 산으로 말안장처럼 생겼다.
맹지기미
길천리 순정 뒤의 골짜기와 그 앞들을 맹지기미라 한다. 그 이름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바들
길천리 후리의 앞들을 바들 또는 파두(坡頭)라 한다. 이것은 ‘바다(海)‘를 뜻하는 바대·바들·바달 등이 변한 말이다. 넓은 들을 바다에 비유하여 ‘배대‘라 부른 경우도 있다. 이 들판에 관개하는 못을 파두못이라 하는 것 역시 바들이 변한 말로 볼 수 있다. 이 파두못에 대하여는 ‘제정샘‘과 관련하여 제정승의 집터를 판 못이라는 전설도 있다. 파두못은 오래된 못으로 예종 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밝얼산
길천리와 거리(巨里)에 걸쳐있는 산이다. 글자 그대로 광명하고 신성한 산이라는 뜻으로 ‘광명= ‘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밝언산·밝어리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 병풍바위 총각바위 찬새미 등이 있다.
복수낭구소 바탱이
길천리 대소나무등 남쪽의 버덩이다. 이 곳에 복숭아나무가 있었으며, 풀이 좋아서 소를 먹이던 곳이었다.
새시기미
길천리 순정 남쪽에 있는 골짜기와 들이다. 이름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기미‘는 ‘구미‘의 방언이다.
소목골:우곡(牛谷)
길천리 후리의 뒷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라 때의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곳에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와 함께 사는 시아버지가 있었다. 하루는 이 사내가 눈이 뒤집혔는지 갑자기 며느리를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놀란 며느리가 손을 뿌리치며 시아버지를 타일렀으나 시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며느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며느리는 하는 수 없이 %dq뒷골에 가서 소울음 소리를 세 번 하고 오면 청을 들어 드리겠다%dq고 하였다. 시아버지는 곧 뒷골에 가서 %dq음메%dq 하고 소울음 소리를 세 번 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며느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세 번 소울음 소리를 내고 오라 한 데는 상피(相避)를 거부하는 매서운 결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곳을 소음골, 또는 소목골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소‘는 높은 산을 뜻하는 옛말로 볼 수 있으며, ‘목‘은 길목이니 산으로 오르는 길목을 뜻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소무등, 대소무등
길천리 소무골의 등성이를 소무등이라 하며, 소무등의 큰 등성이를 대소무등이라 한다.
순정(蓴亭)
길천리 갠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미나리가 잘 자라는 데다 정자나무가 좋은 곳이었으므로 ‘순채 순(蓴)‘자를 붙였다 한다.
안말:안몰
길천리 지화의 자연마을로 뒷마을의 동쪽 안에 있으므로 안말이라 한다.
오산(吾山)
길천리 순정 동쪽의 행정마을이다. 오두산(鰲頭山)이 마을에 늘어져 있으므로 자라같이 생겼다 하여 오산(鰲山)이라 하였다. 오산(鰲山)을 오산(吾山)으로 약사(略寫)하는 곳은 온산면 용암의 오산, 덕신의 오산이 있다. 오산에는 순정과 갠달 등 자연마을이 있다.
오산들, 오산보
길천리의 오산 위쪽에 있는 들을 오산들이라 한다. 여기에 오산보가 있다.
원뚜들:원두던:원제(原堤)
길천리 갠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언덕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불:지화(知火)
길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행정마을로서 공식명칭은 지화(知火)이다. 신라 때 거지화현(居知火縣)의 치소이다. 거지화현은 신라가 거지화의 전신으로 생각되는 기저국(己 國)을 취하여 처음으로 이 곳에 둔 현이다.
거지화의 옛 음은 ‘거치불‘이다. ‘거‘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거‘처럼 수장(首長)에 대한 존칭으로 크다, 위대하다의 뜻을 가졌다. ‘지‘는 ‘치‘로서 ‘지(智)‘와 마찬가지로 연맹왕국시대 족장의 칭호이다.
또 ‘불‘은 나라의 옛 뜻인 ‘벌‘로서 부리·비리·벌·불 등이 성읍도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지화는 성읍국가 시대에 ‘거치‘라고 하는 군장이 다스리던 나라를 뜻한다.
뒤에 신라에 병합되었고, 505년(지증왕 6)에 주·군·현의 제도를 정비할 때 그 족장의 칭호를 그대로 습용하여 현의 이름을 거지화현으로 하였을 것으로 본다. 한편 ‘이불‘은 지화를 우리말로 부른 것으로 ‘이를 지(知)‘, ‘불 화(火)‘에 따라 ‘이를 불‘이 ‘이불‘로 전음된 것이다.
제정새미:제정천(諸政泉)
길천리 진배미 위쪽에 있는 샘이다. 이 곳에는 앞의 소목골 설화가 좀 다르게 변용되어 전해져 온다. 신라 때 제정승이 상처(喪妻)하고 홀아비로 살았는데, 딸도 그만 혼기를 놓치고 말았다. 어느날 제정승이 딸에게 달려들자 딸은 아버지에게 소울음 소리를 낸 후에 오라고 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그 집터였던 곳에 샘이 있어서 이것을 제정새미라 하며, 대문이 있었던 들을 대문간이라 부르고 있다.
조거내샘
길천리 오산 남쪽 들 가운데 있는 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
종자골
길천리 소부등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종자골‘의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죽도가리
길천리 바드래 위쪽에 있는 논이다. 흉년에 죽 한 그릇과 바꾸었기 때문에 ‘죽도가리‘라 한다.
충효사(忠孝祠)
길천리 후리에 있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에 나아가 함께 전사한 박언복(朴彦福)·박인립(朴仁立) 부자를 모시고 있다. 의병으로 싸운 일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93년(선조 26) 7월 13일에 대교 밑에서 박언복이 전사하였고, 아들 박인립은 7월 14일 병영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대천제 밑에서 전사하였다.
박언복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훈련원첨정,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박인립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훈련원정,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효사는 1840(순조 40)년에 언양읍 반곡리에 세웠다가 그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덕현리(德峴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덕현‘은 큰 고개를 나타내는데, 이 곳에 운문고개, 석남고개 등 높은 고개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 석남동(石南洞)이라 하였고, 그 후 하북면에 속하였다. 일제 때인 1911년 덕현동·삽리동(揷里洞)·행리동(杏里洞)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합하여 덕현리라 하였다. 행정상 석리(石里)와 행정(杏亭)의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가지산(迦智山:加智山:伽智山):석남산(石南山):석면산(石眠山)
:실혜산:천화산
덕현리와 경남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경계에 있는 높이 1,240m의 산이다. 경상남도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맹주봉이며, 가지산(迦智山, ‘가‘는 加, 伽로도 나타남), 석남산, 석면산 등으로 불리웠다. 신라 흥덕왕 때 전라도의 보림사에서 가지선사라는 중이 와서 이 산에 절을 세웠으므로 ‘가지산‘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지‘는 까치의 옛말 ‘가치‘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보고 있다. 1215년(고려 고종 2) 각훈(覺訓)이 쓴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원광(圓光)조에, 서기 600년 원광이 본국으로 돌아 올 때 해신(海神)이 나타나 %dq저기 운문산에 까치들이 쪼은 땅이 있을 것이니, 그 곳이 최고의 길지이므로 절을 지어주기를 원합니다%dq 하여 절을 세웠다 한다. 이 때 창건한 절이 청도의 운문사이다. 운문산은 가지산과 바로 이어지는 지맥에 해당된다. 이 운문사를 옛날에는 작갑사(鵲岬寺:까치절) 또는 갑사(岬寺)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권 4, 의해(義解) 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도 까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후삼국 시대에 작갑사 등이 모두 없어지고 폐허가 된 후의 일이었다. 당나라에서 보양국사가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올 때 서해에 이르자 용왕이 그에게 아들을 딸려 보내면서 %dq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의 작갑(鵲岬:가지산)에 돌아가 절을 지으면 수년이 못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군주가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dq 하였다.
보양이 돌아오니 한 늙은 스님이 자칭 ‘원광‘이라 하면서 인궤(印櫃)를 전수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에 보양이 운문령에 올라가 바라보니 까치가 떼를 지어 땅을 쪼고 있으므로, 용왕이 말한 ‘작갑‘이 바로 저 곳이구나 하고 불사(佛事)를 일으켜 작갑사를 세웠다 한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가지산‘이 ‘까치산‘에서 비롯된 이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가지산 북록의 주민들 사이에는 가지산이나 운문산을 까치산, 또는 새산으로 부르고 있다. 울주군 삼동면의 작동리(鵲洞里) 마을과 이 마을의 까치샘 이야기 등 울주군에는 까치와 관련된 설화가 많다.
‘가지산‘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 있다. 불교식 해석이라면 ‘가지산(迦智山)‘은 석가(釋迦)가 머무는 산, 혹은 가섭(迦葉)의 지혜가 담긴 산을 뜻한다. 그러나 신라 때 이 지역에 있었던 거지화현의 ‘거지화‘라는 고을(그 이전에는 부족국가) 이름이 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가지=거지와 관련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상북면에서는 가지산을 산꼭대기가 자주 구름에 덮인다고 해서 구름재라고 한다. 또 천화산(穿火山)이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 산이 화산의 분화구지대임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한편 밀양지방에서는 가지산을 실혜산(實惠山)이라고도 하였다. 그 연유는 산속에 실혜촌, 또는 부요한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광바우골
덕현리에서 소호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 있는 넓은 바위를 광암(廣岩)이라 한다.
구름재
상북면 일대에서는 가지산 정상 일대를 구름재라 부르고 있다. 산꼭대기가 구름속에 덮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는 고개 이외에 ‘산‘의 뜻으로도 쓰인 경우가 많다.
귀바위
덕현리의 가지산에 있는 바위이다.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계를 이루는 우뚝 솟은 바위로서 모양이 귀처럼 생겼다.
까치말리:석남(石南)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옛 이름으로 석남동(石南洞)이 있다. 가지산을 오산(烏山, 새산)이라 하였으며, 이럴 때의 ‘가지‘는 까치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본다. 까치의 옛 말이 ‘가치‘이며, ‘지(智)‘의 옛 음이 ‘치‘이기 때문이다(가지산의 까치 관련설 참조). ‘말리‘는 말랑이·몰랑이가 변한 말로서 산마루가 길게 등성이 진 곳을 나타낸다. 마을이 석남사 아래 있으므로 석남이라 한다.
덕현(德峴)
1911년경 석남동은 덕현동과 삽리동·행리동으로 갈렸다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양등리 일부를 합쳐 덕현리라 하였다. 덕현은 운문고개, 석남고개 등 이 곳이 큰 고개 아래 있으므로 덕=크다는 뜻의 훈을 취한 것이다.
물팍등
덕현리 살티에 있는 산등이다. 지형이 마치 사람의 무릎과 같이 생겼다 하여 물팍등이라 부른다.
미암(米岩):쌀바우:시암(矢岩)
덕현리 가지산 위 경북 청도와의 경계에 있는 높이 약 40m의 바위이다. 지금은 울산지방 클라이머들의 주말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쌀바위에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수도하던 중이 이 바위 밑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염불을 하다보니 바위 틈에 쌀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날부터 한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쌀알이 바위 틈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어느날 중은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면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맹이로 바위틈을 깨뜨려 구멍을 크게 하였다. 그러자 그 때부터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나왔다. 그 후 이 바위를 쌀바위라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언양읍지}에는 이 바위가 시암(矢巖)으로 나타나는데, 쌀=살(화살)로 의역음사(意譯音寫)한 것이다.
이 바위의 어원을 살바위=백암(白巖)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새벽이 하얗게 밝아오는 것을 날이 ‘샌다‘고 하고, 노인의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머리가 ‘샌다‘ 하므로, 태양의 빛을 받아 희하야지는 것을 ‘희할‘이라 하였고, 이 ‘희할‘이 ‘살‘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향(香)을 ‘상‘이라 하고, 형(兄)을 ‘성‘이라 하며, 효자를 ‘소자‘라 하는 것과 같은 예로 보는 것이다. 이 ‘살‘은 한자로 백(白)·설(雪)·상(霜)·운(雲) 등으로 바꾸어 썼다.
부자암(父子巖)
덕현리 운문산에 있는 바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했던 김여경(金麗慶)이 아버지인 김응양(金應亮)을 도와 팔공산의 진중으로 가는 도중 서로 갈라지고 말았다. 해가 저물어 이들은 운문산에 이르러 이 바위에 의지하여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었다. 산 위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부자가 서로 바위의 좌·우측에 뚫린 굴에서 잠을 잤던 것을 알았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부자암이라 불렀다 한다.
불당(佛堂):신리(新里), 동인암(東仁庵)
덕현리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서쪽에 석남사와 동인암이 있다. 절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불당이라 하였다. 새로 된 마을이므로 신리라 한다.
살구정:행정(杏亭)
덕현리 소야정 서남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1911년경에는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덕현리에 합하였다. 흔히 살구정, 또는 살구지이라 부른다. 살구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불당과 살티 두 자연마을이 있다.
살티:시현(矢峴)
덕현리의 불당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언양과 청도의 의병들이 운문재인 가슬현에서 둔병하였는데, 그 때 이 곳에서 화살을 만들었으므로 살티 또는 시현이라 부른다.
‘살‘을 포(包)의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에 ‘포산(包山)=소슬산(所瑟山)‘이 나오는데, 소슬산을 순 우리말로 ‘쌀뫼‘라 하므로 ‘쌀=포(包)‘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살티‘를 높은 산에 에워싸인 곳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풀이한다.
살티순교성지(殉敎聖地)
덕현리의 살티에 있는 천주교박해 역사의 현장이다. 이 곳에 ‘살티순교성지‘라는 기념비가 서 있고 살티공소와 김영제 베드로의 묘소가 있다. 조선말기 천주교박해 당시 신자들이 예배를 드렸던 곳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삽리(揷里):삽재:삽현(揷峴)
덕현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1911년경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덕현리에 합한 마을이다. 마을에서 활을 쏘면 고개에 꽃힌다거나, 의병들이 활쏘기 훈련을 하였으므로 삽재라 부른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삽재는 ‘곶재(古尸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삽(揷)의 훈은 ‘곶‘이며, 곶은 串·岬·花로 표기되었고, 花는 다시 化·華로 호전(互轉)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 4, 의해(義解) 원광서학(圓光西學)조에 가실사(加悉寺)를 가슬갑(加瑟岬)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여, %dq가서(加西) 혹은 가서(嘉西)라 하니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에 고시(古尸)라 하므로 고시사(古尸寺)라고도 하니, 마치 갑사라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천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가슬현이라 한다. 현의 북동쪽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dq 하였다.
이로 미루어 가슬갑사는 운문재의 상북면 쪽 땅에 있었던 유서깊은 절이라 할 수 있다. 덕현리 삽현 마을은 그 훈이 ‘곶재‘로서 곶=고시(古尸)이다.
석남사(石南寺)
덕현리 가지산에 있는 절이다. 영남알프스의 맹주격인 가지산의 좌·우 계곡 물이 합해지는 곳에 백년노송으로 둘러싸인 천년 가람이다. 고승단좌형(高僧端坐形)의 명당길지 위에 자리잡은 비구니 수도도량이다. 청도의 운문사, 공주의 동학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비구니 수도 도량이다.
가지산과 석남사는 서로 뗄 수 없는 역사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가지산이 석남산으로 불리워진 적도 있다. 그러므로 가지산은 석남사가 있으므로 역사를 가진 산이 되고, 석남사는 가지산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절과 그 절이 세워진 산과의 관계를 보면, 사찰과 산이 서로 이름을 주고 받는 경우가 흔히 있다. 순천 송광사는 당초에 송광산 조계사였다가 지금은 조계산 송광사로 바뀐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더러 있다.
석남사는 신라 진평왕 49년(627)에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영남에서 제일 큰 절이란 뜻으로 석남사(碩南寺)이라 하였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가지산은 본래 석남산이라 했다. 현종 때 강응(姜應)이란 현감이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석남사를 중건하려고 탁령 등의 중을 모집한 후 도의국사를 창건주라 하고 석남산을 가지산으로 부르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석남사는 그 시초가 신라 아달라왕의 영신타령소(影愼妥靈所)에서 출발했다 한다. 여기의 영신타령소는 영정을 봉안한 아달라왕의 묘당이란 뜻이다. 한편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신라사연구}에 의하면, 신라의 박씨족은 경주의 서남부쪽으로 발전하였다 한다. 박곡(朴谷)·박달(朴達)·열박재(悅朴峴)·우박천(禹朴川:경주시 외동읍) 등 지명이 이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주민도 박씨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박씨왕인 아달라왕의 묘당이 가지산에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본다. 그 후 석남산 아달라왕 묘당 옆에 불당이 생겼는데, {언양읍지}는 %dq석남사가 본래 아달라왕의 영신타령소였다%dq고 기록하고 있다.
석남사에는 23동의 건물이 있으며, 1천명 스님의 밥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는 엄나무구유를 비롯하여 부도와 석탑 등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다음 시는 석남사 강선당에 새겨진 주련이다.

구름 첩첩 이어져 푸른 바다 이루는데
늙은이는 홀로 앉아 푸른 봉우리에 깃들었네
무심한 내 마음은 물처럼 동으로 흘러가고
깨끗한 내 마음에 도(道)는 스스로 참되어 지네

늙은이 홀로 푸른 산에 깃들어
좁은 방에 한가로이 백발을 맡겨두네
지난 날과 오늘은 한탄스럽기만 한데
무심한 내 마음은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구나

석남사 부도(浮屠)
덕현리 1061번지 석남사 남쪽에 있는 부도이다. 제작 연대는 10세기 경인 신라말 혹은 고려 초로 보고 있다. 높이 3.53m이고 8각 원당형으로 된 우수한 작품으로 하대석 주위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폭에 비하여 높이가 높아 안정감이 다소 부족하다. 도의선사 부도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물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석남사 3층 대석탑(大石塔), 석남사 3층 석탑
덕현리의 석남사에 있는 탑이다. 석남사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앞에 각각 탑이 서 있다. 대웅전 앞의 것은 규모가 크고, 극락전 앞의 것은 탑이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전 앞의 탑을 대석탑이라 하고, 극락전 앞의 것은 3층석탑이라 한다.
대석탑은 신라 일반형 3층석탑으로 821년(헌덕왕 16)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으로 세웠다 한다. 높이는 11m, 지대석의 폭은 4.75m이다. 임진왜란 때 도괴된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다. 그 해에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와서 그 중 1과를 이 탑에 봉안하였다. 대형석탑으로서 역사가 깊고 제작 기법도 우수하나 아직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였다.
극락전 앞의 3층석탑은 높이 2.5m의 소형탑으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다. 역시 신라말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석남재:석남고개
덕현리에서 경남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얼음골로 넘어가는 가지산 남쪽의 고개를 말한다. 석남재의 서남방이 된다.
석리(石里)
덕현리의 행정마을이다. 옛 석남동을 말한다. 소야정(所也亭)과 삽재(揷峴)·까치말리 세 자연마을로 되어있다.
소야정(所也亭)
덕현리 등 자연마을이다. 마을 이름에 ‘정‘자만 붙었을 뿐 소야는 소호의 옛 이름과 같다. ‘소야‘는 ‘수리‘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수리는 산악 또는 봉우리를 뜻하는 이름이며, 蘇·近·所·述·戌·率·鷲 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따라서 소야정은 ‘수리정‘을 뜻하는 말이며, 산의 정자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영남(嶺南)알프스, 북 알프스, 남 알프스, 동 알프스, 서 알프스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상북도 경주시·청도군, 경상남도 양산시·밀양시의 2개 도와 1개 광역시,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약 255㎢의 1,000m급 8개 산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산악군을 영남알프스라 한다.
이 산들은 백두대간에서 나누어진 낙동정맥의 중심을 이루는데, 영남의 지붕, 또는 영남의 병풍을 이루고 있으므로, 유럽의 지붕으로 불리우고 있는 알프스 산맥과 같다고 하여 산악인들이 ‘영남알프스‘로 부르게 된 것이다.
영남알프스는 최고봉인 가지산(迦智山:1,240m)과, 고헌산(高 山:1,032.8m), 운문산(雲門山:1,188m), 문복산(文福山:1,013.5m)을 중심으로 한 북알프스와 재약산(載藥山:1,189.2m, 일명 천황산), 취서산(鷲棲山:1,092m), 신불산(神佛山:1,208.9m), 간월산(肝月山:1,083.1m)을 주축으로 한 남알프스를 말하며, 여기에 그 남쪽의 정족산(鼎足山:700.1m), 천성산(千聖山:811.5m), 원효산(元曉山:922.2m)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영남알프스는 또 동 알프스와 서 알프스로 나누기도 한다. 울창한 숲과 계곡, 기암괴석과 고산평원, 신라시대의 사찰을 비롯한 많은 역사·문화유적, 숱한 전설과 사연을 지닌 이름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영남지방은 물론 경향 각지에서 사시사철 등산객이나 관광 탐승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와항현(瓦項峴):와항재
덕현리에서 경북 청도군 운문면 와항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흔히 외항만디이라 한다.
우뢰들
덕현리에 있는 돌들건으로 고헌산 쪽에 있다. ‘돌들건‘은 큰 바위덩이들이 풍화작용으로 깨어져서 덮은 계곡과 그 밑으로 흐르는 물을 말한다. 이 돌들건 밑으로 물이 흘러 쿵쿵하는 소리가 나므로 ‘우뢰들‘이라 한다.
운문령(雲門嶺):운문재
덕현리에서 경북 청도로 넘어가는 높이 1,107m의 재를 운문재라 한다. {삼국유사} 권 4, 의해(義解) 원광서학(圓光西學)조에는 가슬갑(嘉瑟岬)이라고 나오는데, 가서현(加西峴), 또는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하였다. ‘가슬·가서‘는 모두 ‘갓‘으로 산림을 뜻하는 말로 본다.
운문산(雲門山):가슬현(嘉瑟峴)
불가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운수승(雲水僧)이라 하듯이, 운문은 불가를 향한 문을 나타낸다. ‘운(雲)‘은 수행을 위한 일처부주(一處不住)를 뜻한다. 옛날에는 가슬현(嘉瑟峴)이라 하였는데, 가슬은 ‘갓‘에서 나온 말로서 울창한 산림(山林)을 뜻하였다. 청도군에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운문사(雲門寺)가 있다.

원바우
덕현리 석남재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 밀양부사가 언양고을에 온 일이 있었다. 석남재를 넘어왔다 돌아가는 길이 하도 험하여 죽을 고생을 다 하였다. 그가 숨이 차서 앉아 쉬다가 바위에 한 글귀를 적었는데, 이 고개를 두 번 넘어가는 사람을 소나 말에 비유하였다. 뒷날 석공을 시켜 음각하였다 한다. 이런 사연으로 원바우라 불렀다.
큰 잣방골, 작은 잣방골
덕현리 살티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이 자빠진 형세를 하고 있으므로 잣빵골이라 한다. 큰 잣방골과 작은 잣방골이 따로 있다.
흰죽사발
덕현리 고헌산 쪽에 있다. 옛날에 산사태가 나서 마치 흰죽을 엎지른 것 같이 흘러내렸으므로 흰죽사발이라 부르게 되었다.

등억리(登億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옛날부터 등억이라 불러왔으며, 상남면에 속하였다. 일제초기인 1911년 등억과 신리(新里)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두 마을을 합하여 등억리가 되었다. 화천(花川) 또는 곶, 혹은 곶내라고도 부른다.
‘등억‘에 대하여는 산등성이를 뜻하는 등어리=등억설, 등(登)어귀=등억설, 등악(岳)=등억설이 있으나, 등어귀(산을 오르는 어구의 뜻)의 뜻을 취하고자 한다. 곧 등억의 ‘억(億)‘을 ‘어귀‘의 음차로 보는 것이다. 한편 곶, 곶내, 화천이라는 이름은, 이 곳 지형이 곶으로 되어있고, 양쪽에 내가 흘러 부르게 된 이름이다. 행정마을도 등억리 단일마을로 되어있다.
간월(肝月)
등억리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간월산 아래 있으므로 마을 이름도 ‘간월‘이라 하였다.
간월산(肝月山)
등억리와 이천리 경계에 있는 높이 1,083m의 산이다. 영남알프스를 형성하고 있는 산악군 중에서 신불산 등과 함께 남 알프스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간월산은 신불산·간월산 등이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옛날에는 이들을 통틀어서 취서산이라 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간월산 죽림굴은 천연동굴로서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었던 곳이며, 그들이 세운 영남 최초의 공소가 불당골에 있었다 한다.
간월산의 ‘간‘은  , 검, 곰, 금 등으로 전음되는 ‘신(神)‘의 옛말에 대한 음차이다. 곧 간월산은 ‘ 달뫼‘로 풀이되며, 신령한 산을 뜻한다. 그러므로 간월산의 한문표기는 의미가 없다.
이 곳에 간월사(肝月寺)가 있다. 뒤에 세상 사람들은 간월사의 지령(地靈)이 통도사를 향하여 달아났다 했다.
간월사지(肝月寺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간월사지는 일명 관월사(觀月寺)가 있었다는 곳을 말한다. ‘관월사기(觀月寺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므로 오늘날 불리워지고 있는 ‘간월산‘이니 ‘간월사터‘니 하는 이름들은 ‘관월‘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세웠다 한다. 대가람이었던 듯하며 간월산 일대에 12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5백 나한을 곳곳에 두었다. 또 지금 석남사에 보관된 구유는 원래 간월사에 있었던 것이라 하는데, 승려 1천명이 한꺼번에 먹을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이다. 이 구유에 ‘간월사(澗越寺)‘라고 새겨져 있어 절 이름에 관하여도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여기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신라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370호이다. 좌고(坐高)는 1.35m이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의 것으로 보고 있다. 울주지방에 현존하는 불상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과부성(寡婦城):시리성
등억리 마을 뒤의 조그만 산 위에 있는 성이다. {언양읍지}에는 이 성의 둘레가 2천척이며, 성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언양지방 의병들이 이 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왜병들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과부가 생겨났을 것으로 보며, 성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성을 ‘시리성‘이라고도 하는데, 성이 시루(甑)를 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조성(丹鳥城):단지성
등억리와 삼남면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가 4,050척이다. 성안에 10개의 못이 있었다고 하며, 그 중 하나는 천지(天池)라 하여 비가 오나 가뭄에나 물의 양이 변함없었다 한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남을 순행할 때 단조봉에 올라보고 ‘만부(萬夫)가 당하지 못 할 것‘이라고 그 견고함을 탄복했던 성이다. 일명 단지성이라고도 한다(삼남면 가천리 단조성 참조).
등억신리(登億新里):등억새마을
등억과 간월의 중간에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등억신리라 한다. 등억새마을이라고도 한다.
왕방재:왕봉현(王峰峴)
단조봉은 일명 왕봉이라고도 하며, 등억에서 배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재가 왕봉을 지나게 되므로 왕봉재라 하던 것이 변하여 왕방재가 되었다.
홍류폭포(虹流瀑布)
단조봉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이다. 작천정을 지나 작괘천을 따라 오르면 간월사지가 나오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다. 폭포수가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가 서린다 하여 홍류폭포라 한다. 높이 109척의 이 폭포에서 흩어져 내리는 물은 아래에서 보면 눈처럼 희다. 봄에는 무지개가 서리고 겨울에는 고드름이 절벽에 달린다.
저승골
등억리 간월에서 서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와 높은 벼랑이 매우 험하므로 저승골이라 한다.
화천(花川)
등억리는 등억보다는 화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옛날 마을 근방에 꽃이 만발하여 그 꽃잎이 냇물에 흘러 떠내려 갔으므로 곶내 또는 화천이라 불렀다 한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천화현(穿火峴)‘에서 비롯된 ‘천화‘의 도사(倒寫)라 하는 견해도 있다.

명촌리(鳴村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상남면에 속한 명촌동이었다. 1911년 명촌과 사광(斜光)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다시 합해져 명촌리가 되었다. 봄에 새들이 모여들어 요란하게 울어대므로 ‘명촌(鳴村)‘이라 하며 마을이 발전할 것이라 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혹은 떵떵 울리고 사는 당당한 마을이 된다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
행정상의 마을은 명촌리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갈치못
명촌리 등말리의 북쪽에 있는 못으로 못이 칼치처럼 길게 생겼다.
남애(南涯)
명촌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에 위치하므로 그 방위를 따라 ‘남(南)‘에 처소격조사인 ‘에‘를 붙였는데, 이 ‘에‘가 ‘애(涯)‘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앞에‘를 표기하기 위하여 ‘남애‘라 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남(南)‘의 훈이 ‘앞‘이기 때문이다. 명촌에서 볼 때 앞마을이 되기 때문이다.
내리골
명촌리 박수때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너럭바위가 내리 깔려 있으므로 내리골이라 한다.
늘뫼
명촌과 사광의 뒷산을 늘뫼라 한다. 늘어진 산이라는 뜻이다. 산세가 마을 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게 늘어진 경우에 늘뫼라 한다.

능말리
명촌리 북쪽에서 길천리의 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능말리‘라고 부르게 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막거리
명촌리의 모래낭걸 동쪽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에 농막이 있었다 한다.
명헌(鳴軒)
명촌의 가운데에 있는 옛 집이다. 일명 만정헌(晩定軒)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현감을 지낸 김자간(金自幹)이 경주로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잡고 지은 정자이다.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기둥머리에 장식이 없는 도리집이다. 울산지방에서 가장 오래 된 약 5백년의 연륜을 가진 건물이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모래낭걸
명촌리의 숲걸 동쪽에 있는 들로 옛날에 모과나무(방언으로 모래나무)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박수태(때)
명촌리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박토(薄土)의 논이 있으므로 박수태라 한다.
뿔당골
명촌리의 새목딩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불당이 있었다.
사광(斜光)
명촌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간월산 위에 기울어진 달빛이 밝다 하여 사광이라 한다. 사광의 뒷산은 늘뫼라 하는데, 마을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을 뒷쪽에 삼국시대의 취락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새목딩
명촌 동쪽에 있는 등성이로 지형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
생이집걸
명촌리의 진배미 북쪽에 있는 논으로 옛날에 이 논 부근에 상여집이 있었다.
소디미, 소디미논
명촌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 무성하여 소를 놓아서 먹였다. 이 곳에 소디미 논이 있다.
안산(案山)
명촌의 동편에 있는 산이다. 안산(案山)은 앞산을 일컫는 말이다. 안산의 남쪽 산을 대너더기라 하며, 남쪽으로 광대고개에 이어진다. 안산의 북쪽 끝에는 굴바우가 만당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바위 일부가 퇴락하여 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정려각(旌閭閣)
명촌에 있는 옛 정각이다. 영조 때 명촌에 살았던 김차안이라는 선비에게 광주노씨 성을 가진 부인이 있었다. 노씨는 평소 성품이 소박하고 정렬하더니, 지아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녀 때문에 따라 죽지 못함을 한탄하며 3년간 고기와 생선을 먹지않고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씨의 행적이 순찰사에게 알려져서 조정에 보고되고 마을을 정려하게 되었다.
짱바탱이
명촌리의 노산 동쪽에 있는 버덩으로 옛날 나무꾼들이 장을 치며 놀았던 곳이다.
회나무:괴목나무
명촌리에 있는 나무이다. 현종 때의 명천부사 최경로(崔慶老)가 처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수령이 300여 년 되는데, 높이는 13m, 둘레는 3m 쯤 된다. 후손들이 지금도 나무의 상태를 확인한다고 한다.

산전리(山前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고헌산 앞에(남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산앞‘ 또는 ‘산전‘이라 하였다. 본래 언양군 하북면에 속한 곳으로서 1911년경에는 도동(道洞)·산전·궁평(弓坪)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이를 다시 합하여 산전리라 하였다. 산전과 도동 두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상북면 소재지로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과 학교 등이 있다.
가누골:관운곡(觀雲谷)
산전리의 궁평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름을 본다는 뜻이나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구개밭골:구가밭골:구향교전곡
산전리 예수드미 남쪽 골짜기이다. 옛날 구씨(具氏)들이 살면서 경작하는 밭이 있었던 곳이다. 혹은 구교(舊校:구향교)에 딸린 밭이 있었다고 한다.
골태이
산전리 궁평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궁평에 부자가 살았는데, 찾아오는 손님 대접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루는 중이 찾아왔기에 %dq어떻게 하면 손님들을 오지 않게 하겠는가?%dq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은 %dq집 뒤에 골을 파면 소원대로 될 것%dq이라 하였다. 중의 말을 들은 부자는 사람을 시켜서 골을 파두었더니 과연 손님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 집도 가세가 기울어서 망해버렸다. 지금도 골을 판 자리가 남아 있어 이 곳을 골태이라 부른다.
궁평(弓坪)
산전리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궁평이라는 이름의 ‘궁(弓)‘은 마을이 활같이 생긴 지형의 특성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지형상 굼 깊은 곳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봐야한다. ‘궁‘과 ‘굼‘은 음(音)이 비슷한 말이기 때문이다.
금오골:금오곡(金鰲谷)
산전리 궁평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자래등 아래가 되므로 금오골이라 한다. 자라=오(鰲)를 취한 것이다.

도동(道洞):도산(都山:陶山)
산전리 궁평 북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도동‘은 ‘들골‘의 변전(變轉)으로 볼 수 있다. 또 경주로 통하는 큰 길가의 마을이었다는 설도 있다. 자연마을로 송락골이 있다.
돌방갓
산전리 도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둥글넓적하게 생겼으므로 돌방갓이라 한다.
들고개
산전리 궁평에 딸린 마을로서 서쪽에 있다. 들고개(入峴)와 들고개(野峴)의 두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전자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딧갓만딩이
산전리 궁평 뒷쪽에 있는 산이다. ‘딧갓‘은 뒷산을 뜻한다. 높이 216m이다.
만당걸:만당천(萬堂川)
태화강 상류인 상북지방의 내를 만당걸이라 부른다. 이 일대는 신라 때 부족국가와 거지화현의 치소(治所)이다. 여기에 만채의 집이 들어서 있었다 하여 만당이라 한다. 이 곳의 들을 만당들, 내를 만당천(걸)이라 한다.
상북면사무소(上北面事務所)(건물)
산전리 549번지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일제 때인 1932년에 세운 목조건물로서 기둥이나 기본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면사무소는 2001년 7월 경 새로 지은 청사로 옮겼는데, 이 건물이 도시계획상 도로에 저촉되므로 헐리게 되어있다. 면 자치위원회에서 보존 여부로 논란이 일고있는 건물이다. 전국의 면사무소 건물 중 일제 때 지은 목조건물로서 이처럼 원형대로 잘 보존된 예가 없으므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도서실이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명암(鳴岩):우는 방우
산전리 송락골 북쪽에 있는 바위로 높이가 약 2m이다. 바람이 불면 윙윙 소리가 난다.
문방우
산전리 가누골 북쪽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
박사이등
산전리 너븐등 동쪽 등성이로 지형이 밥상처럼 생겼다.
부랄방우
산전리 송락골 북쪽 길가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불알처럼 생겼다.
비들방우
산전리 송락골 서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산비둘기 집이 있었다.
비시미:비심(飛尋)
산전리 도동과 궁평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대개 ‘ ‘이 변하여 생긴 이름들은 흔히 높은 산 아래 분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고헌산 아래 있는 마을로서 ‘비시미‘의 ‘비‘도  에서 변전한 배-비로 볼 수 있다.
한편 시미는 ‘섬(島)‘의 뜻으로 보는데, 가령 속시미=속도(束島)의 예와 같다. 비시미의 경우도 비시미=비도(飛島)로 풀이하는 것이다. 내륙지방에도 요도, 고래섬 등 ‘섬‘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이 외에 비시미를 산 끝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시미 마을에서는 ‘비잠(飛岑)‘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산전(山前)
산전리에서 설명하였다. ‘산앞‘이라는 뜻이다. 궁평과 비시미의 두 자연마을이 있다.
산전고분(山前古墳)
산전리 비심마을 뒷편 산에 있는 석실분(石室墳)이다. 돌로 짜서 석실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사람이 설 정도이다. 이 곳에서 석함, 숟가락, 토기 등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
송락골:송락(松落谷), 송락골 못
산전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 때 이 부근에 영구사 혹은 연고사(連高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므로 승려들이 석남사나 운문사를 왕래할 때 여승들이 주로 쓰는 송라(松蘿:소나무 겨우살이로 집주저리와 비슷하게 만든 것)를 쓰고 다녔으므로 송낙골이라 부른다 한다. 이 곳에 송락골 못이 있다.
예수드미
산전리 송락골 서북쪽에 있는 더미이다. 예수(여우)굴이 있었다 한다.
오룡골(五龍谷)
산전리 도동 동쪽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다섯마리 용과 같은 모양을 가졌다 하여 오룡골이라 부른다. 혹은 오룡에게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보기도 한다.
왼개미:원감고개:왼개미고개
산전리 도동 동쪽에서 지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름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웃왼개미고개와 아랫왼개미고개가 있다.
은행나무
산전리에 있는 수령 370년 된 은행나무이다. 높이가 18m, 둘레가 5m이다. 동래정씨가 심은 것이라 하며 후손들이 보호하고 있다.
자래등
산전리 금오골 위쪽에 있는 등성이로 지형이 자라처럼 생겼다.
총돌
산전리 부랄방우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총처럼 생겼다.
희미기
산전리 궁평 서북쪽에서 궁근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형이 희목처럼 잘록하다 한다.


소호리(蘇湖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경주군 남면(南面) 때는 소야동(所也洞)이라 하였다가, 정조 때 소야리(所也里)라 하였다. 울산군으로 이속되어 두북면에 속했던 1911년 소호동(小湖洞)과 태종동(太宗洞)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동을 합하여 소호리(小湖里)라 하였고, 뒤에 소호리(蘇湖里)로 고쳐 불렀다. 1973년 7월 1일 상북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마을도 소호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소호리의 옛 이름 ‘소야‘는 ‘수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며, 이것은 지대가 높은 산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고무들
소호리 태종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무딸(딸기)이 많이 났다.
경남들:정남들
소호리 새앳들 북쪽에 있는 들로 옛날에 정남사라는 절이 있었다.
기와목:잿목:와리(瓦里)
소호리의 당리 서쪽 마을로 옛날에 기와를 만들었던 곳이라 한다.
느티나무
소호초등학교에 있는 나무로 수령이 4백년 쯤 되며 높이는 15m 쯤 된다.
당리(堂里):당수말
소호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당수나무가 있으므로 당리, 또는 당수말이라 한다. 이 곳에서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지냈다.
대리(大里)
소호리 당수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 곳이 소호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도장곡(道藏谷)
소호리 당수말 남쪽 골짜기이다.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골짜기가 길을 감춘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벌샘:벌천(伐泉)
소호리에 있는 샘으로 ‘벌샘‘은 너른 샘이라는 뜻이다. 이 곳에서 모래가 물과 같이 솟아 나온다 한다.
새기바우
소호리 시드미 위에 있는 바위로 이 곳에서 석이버섯이 났다 한다.
소야(所也):소호(蘇湖:小湖)
소호의 옛 이름 소야는 ‘수리‘를 뜻하는 이름으로 본다. ‘수리‘는 높이 솟은 산을 말하는데, 다른 여러 한문글자를 빌려 썼다.
그러므로 ‘소야‘는 높은 산마을, 또는 높이 솟은 분지마을을 뜻하는 이름으로 본다. 소야를 소호로 고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소똥골
소호리 잿목 서쪽 골짜기로 옛날에 소를 놓아 먹이던 곳이므로 소똥이 많았다 한다.
소호령(蘇湖嶺)
소호리 도장골 동남쪽 고개로 높이 669m이며, 두서면 인보리와 경계가 된다.
백운산(白雲山):열박산
소호리와 두서면 경계에 있는 높이 901m의 산이다. 영남알프스 중 북알프스를 형성하고 있다. 인근 밀양시 산내면에 있는 백운산(885m)과 혼동하기 쉽다. 열박산이라고도 한다. ‘열박‘은 신라의 고유한 말로서, ‘열(咽)‘은 열다는 뜻을 지닌 ‘열‘의 음차(音借)이고, ‘박(薄)‘ 역시 ‘ ‘의 음차로서 신라의 박(朴)과 같은 ‘밝다‘는 뜻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열박산은 환하게 열리고 밝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본다. 도둑이 많아서 낮에는 열 사람, 밤에는 백 사람이 함께 넘어 다녀야 했으므로 ‘열박산‘(咽薄山, 열백산)이라 했다는 속전도 있다.
열박산이 백운산으로 이름이 바뀐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얽힌 김유신 장군에 관한 설화는 두서면 열박산 항에서 소개하였다.
시이드미:싱이드미
소호리 잿목과 당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마치 싱이(상여)처럼 생겼다 한다.
천지방우
소호리 당리 남동쪽 들가에 있는 바위이다. 매년 6월 15일(유두)에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혹은 옛날 천군(天君)이 제천의식을 행하던 곳이라 한다.
태종(太宗)
소호리 도장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태종(임금)과 관련된 내력은 확인할 수 없으며, 크고 높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양등리(楊等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상남면에 속한 마을이었으며, 일제 때인 1911년 개편과 1914년 전국적인 개편 때도 변함없이 양등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내려온 마을의 하나이다. 행정마을도 양등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양등‘이라는 이름은 버드나무가 많은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 온다. 그러나 ‘양등‘은 우리말 ‘버들‘의 이두식 표기로 보이며, ‘양(楊)‘은 버들의 훈자로서 ‘버‘를 나타내고, ‘들‘을 ‘등(等)‘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 버들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버드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울산지방에서 흔히 사용된 뻐든·버든, 즉 원야(原野)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매방우
양등리 석섬방우 동남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
감태방우
양등리 안골에 있는 바위로 감투처럼 생겼다.
검은바위
양등리에 있는 바위이다. 색깔이 검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모양이 거미같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흑암(黑岩)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곳에 금산(錦山)이 있음을 볼 때, 이것은 신(神)이나 왕을 뜻하는 ‘ ‘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아진다.  은 儉·檢·錦·琴·蓋馬·乾馬·金馬·固馬·釜·黑·公·熊 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국수목(國樹木)
양등리 마을 뒤에 있는 소나무이다. 마치 충북 보은에 있는 정2품 소나무처럼 생긴 노목이다. 이 나무를 국수라고 불러오며, 해마다 음력 1월 12일과 8월 12일에 당제를 지냈다. 지금은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의 당제와 함께 지낸다.
금산(錦山):상칭이비알:걸금산
양등리 큰 각단 북쪽에 있는 산이다. 궁내부 시어(侍御)를 지낸 김락진, 주사 김태진, 군수 김영진 형제가 살았던 수성재(守性齋)가 있다. 양등의 마을도 이 산 아래에 있다. 이 산을 걸금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검금산이 변한 말로 보고 있다. 또 이 산 아래 있는 바위를 검은바위·거미바위라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금산은 ‘감뫼(神山)‘의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딱밭들갱
양등리 배앙골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딱나무밭과 너설이 있었다 한다.
말사리
양등리 중봇들 남쪽에 있는 논이다. 이 논에서 나는 수확으로 말을 먹였다 한다. ‘사리=사래‘이다.
매봉산
양등리 서쪽에 있는 산으로 매봉재라고도 한다. 마치 매가 솟아오르는 것 같다 하여 매봉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밀봉암(密蜂庵)
양등리 텃걸 서북쪽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밀봉암 자리에는 원통전(圓通殿)만 있었을 뿐 절은 허물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하룻밤 동안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원통전에서 미륵불이 솟아나는 꿈을 꾸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꿈이라 하여 이를 부처님의 계시로 알고 암자를 지어 마을에서 관리해 왔다. 큰 바위 밑에 석실이 있어 여기에 산신각을 지었다. 이 절에서 불공을 드리면 생남한다 한다.
절 주위에 벌이 많으므로 밀봉암이라고도 부른다.
우무절들
양등의 동쪽에서 거리(巨里)에 걸쳐 있는 넓은 들이다. 옛날 이 곳에 우무절이 있었다 하는가 하면, 청도의 운문사에 딸린 들이었다고도 한다. 우무절이란 큰 샘이 있다.
장구모기
양등리 북서쪽에서 궁근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형이 장구목처럼 잘록하다.
짜빵골, 큰짜빵골
양등리 살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짜빵골‘ 이름의 내력은 확실하지 않다. 옆에 큰 짜빵골도 있다.
텃걸:덕걸(德杰)
양등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크고 뛰어난 사람이 살았다 하여 덕걸(德杰)이라 부른다. 또 텃걸·터실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터골‘이 된다. 터는 마을의 터전을 말하는 것으로, 기(基)·대(垈)의 뜻을 지녔다. ‘실‘은 골을 나타낸다.

이천리(梨川里):배내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언양군 하북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배내‘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도 단일마을로 일관해 왔다. 이 마을은 간월산, 신불산,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계곡에 위치하며 물의 흐름도 낙동강 수계에 해당된다. 심지어는 낙동강의 깔따구가 이 마을까지 올라왔다 한다.
해방 후 이 근처의 험준한 산악에서 준동하던 공비 때문에 1949년 마을사람들이 한동안 마을을 비워두고 소산(疏散)하였다가 뒤에 다시 돌아와 복원한 마을이기도 하다.
이천리=배내는 높은 산으로 둘러 싸인 밝은 마을을 뜻하는 이름이다(배내 참조). 혹은 시내(川)의 생김새가 베(피륙)를 길게 펼쳐놓은 듯 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행정마을도 이천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내리정:진전(陳田)
이천리 주개 서남쪽 마을이다. 일명 진전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내리‘라는 말은 ‘배내‘의 ‘내‘를 말한다. ‘정‘은 정(亭) 또는 정(汀)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능동산(陵洞山)
이천리의 북쪽 경남 밀양시 산내면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알프스의 한 산봉우리로 높이가 982m이다.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이 석남고개를 지나 남서 방향과 배내고개의 두 지맥으로 갈라지는 곳이다. 남쪽으로는 재약산 사자평 등으로 이어진다.
‘능동산‘이라는 이름은 그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능=큰 무덤이라기 보다는 능=구릉의 긴 능선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대밭마을:죽전(竹田)
이천리 배내의 남쪽에 있는 자연마을로 대밭이 많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배내:이천(梨川)
배내의 본 마을은 ‘배내 큰 마을‘ 또는 ‘이천대리(梨川大里)‘라 부르고 있다. ‘배내‘라는 이름은 광명 또는 국토를 뜻하는 ‘ ‘ 또는 ‘ ‘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이 ‘배‘로 변전한 것이다. 예컨대 새 =새배,  고개=배고개로 된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배‘는 동방의 종족들이 한결같이 하늘과 해를 신앙하고, 하늘을 그들의 원주지로 생각하며, 높은 산을 하늘의 연장으로 관념화한 데서 온 말일 것이다. 울산지방에 분포된 ‘배‘계 지명들은 한결같이 높은 산 아래에 있다. 한편 배내의 ‘내‘는 내(壤)를 뜻하는 말로서 우리의 생활터전이 되는 땅을 말한다.

배내동굴:이천동굴
간월산의 단조봉에서 배내로 내려오는 길 옆에 있는 동굴이다. 옛날 도둑들이 주철을 만들어 숨긴 곳이라 전해온다.
배내 오재(五嶺):덕현재, 긴등재(穿火峴), 신불재, 왕방재, 금강골재
이천리에서 외부지역과 통하는 고개이다. 간월산을 넘어 배내로 통하는 다섯개의 고개를 말한다. 덕현재는 북쪽의 덕현리와 통한다. 긴등재는 길천리 순정마을로 통하는데, 등성이가 길다는 뜻이다. 왕방재는 왕봉으로 넘어가는 재이며, 금강골재는 삼남면 금강골로 통하고, 신불재는 신불산을 넘어가는 재이다.
백련(白蓮)
이천리 대밭마을 아래 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련정(白蓮亭)이란 정자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범바웃골
이천리 천황산(재약산)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 범이 살았다 한다.
사기점골
이천리 천황산(재약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사기를 굽는 점(店)이 있었고, 백자요지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 요지가 남아 있다. 이를 ‘천황산 요지군‘이라 한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때의 요지로서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석남사에서 남쪽으로 배내 마을이 바라보이는 산정을 올라가면 울주군과 경남 밀양시 단장면 경계를 이루는 표고 1,189m의 천황산에 이르게 된다. 이 천황산의 동남쪽 표고 900m가량 고원의 초원지대를 사자평 또는 사자벌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5∼6기의 철화문(鐵畵文) 백자요지가 있다. 옛 도장(陶匠)들이 왜 이처럼 높고 험한 산정에서 그릇을 만들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기 원료인 흙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자평(獅子坪)
재약산과 신불산이 이어지는 울주군 삼남면·상북면, 경남 밀양시 단장면, 양산시 경계의 영남알프스 중 남알프스의 고원지대를 사자평 또는 사자벌이라 한다. 사자평은 조선시대 백자요지군이 있는 사기점골 일대를 말한다.
‘사자‘는 넓다란 벌을 뜻하는 이름으로,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사(沙)‘라 하였다. ‘자‘는 산의 옛 말인 ‘자·재‘를 나타내는 말로 보기도 한다. 이 사자는 불가에서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하고, 부처의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 하듯이, 부처를 사자에 비유하는데, 그러므로 사자벌은 이에 연유한 불교식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신불산(神佛山)
이천리와 등억리, 삼남면 가천리, 그리고 양산시 경계에 있는 높이 1,209m의 산이다. 영남알프스 중 남알프스에 해당하며, 간월산과 영취산(취서산)의 중간에 있다. 영취산의 취령(鷲靈)과 부처가 함께 있으므로 신불산이라 부른다.
신불산이라는 이름은 ‘신(神)‘이 곧 간월산의 ‘ ‘과 같은 뜻의 신성지(神聖地)이며, ‘불(佛)‘은 ‘벌(伐)·불(火)‘을 뜻하는 차음표기로서 광명을 의미하는 ‘ ‘으로 본다. 특히 신불산이나 그 앞뒤 산들의 정상을 보면 산꼭대기가 넓은 산상벌판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불=화(火)가 곧 평원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불산은 ‘  매‘로 풀이한다. 이는 정상을 왕뱅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왕봉(王峰)을 말하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옛날 배내골에 사는 한 촌부가 언양장에서 소를 팔고 신불산 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때 산기슭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dq지금부터 내가 길을 인도할 테니 나를 따라오시오%dq 하고는 호랑이를 피하게 하여 무사히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 후 이 곳은 산신령이 불도를 닦는 산이며,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도움을 주어 신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심종태바위
이천리의 천황산에 있는 바위이다. 천황산(재약산) 봉우리가 동쪽으로 늘어진 곳에 있다. 바위 아래에는 수십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굴이 있어,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었다 한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심종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모의 제사에 쓰려고 비리묵은 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가 길렀다. 정성을 들여 키운 송아지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서 중송아지가 되었는데, 어느날 도둑들이 몰래 송아지를 훔쳐가고 말았다.
부모님 제삿날은 돌아오는데 송아지가 없어져서 딱하게 된 심종태는 송아지를 찾아다니다가 이 굴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굴에서 도둑들을 만나 소를 잃어버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심종태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에게 소 판 돈 30량을 돌려주었다. 이로써 심종태는 무사히 부모님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역적치발등
이천리 왕방산 꼭대기에 있는 등성이이다. 이 곳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고 하여 역적치발등이라 한다.
주계(舟係):주개듬:주개더미
이천대리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산더미 같은 바위가 있는데, 배(舟)가 떠내려 오는 모양을 하였다 하여 주계덤이라 부른다. 이 ‘주계‘는 배내의 ‘배‘를 배(舟)로 본데서 온 말로 본다. 결국 ‘주‘는 ‘ ‘이 변한 말로 볼 수 있다.
천황산(天皇山):재약산(載藥山)
상북면 이천리와 경남 밀양시 단장면, 산내면 경계에 있는 높이 1,189m이며, 영남알프스 중 남알프스를 형성하는 산이다. 백자요지를 비롯하여 금강폭포, 층층폭포, 사자폭포, 비호폭포 등이 있고, 그 밖에도 절경이 많다. 재악산(載嶽山), 재암산(載岩山)이라고도 하며, 밀양쪽의 산자락에는 호국의 성지인 표충사가 있다.
‘재약산‘이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흥덕왕 때 셋째 왕자가 이름모를 병에 걸려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을 찾아 기도하고, 약수를 마시며 병을 치료하다가 이 산에 오게 되었다. 그 때 왕자의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산기슭에 솟아나는 샘을 가리키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왕자는 신령이 가리킨 약수를 찾아가 샘물을 마셨는데, 고질병이 씻은 듯이 고쳐졌다. 왕자는 궁궐에 돌아와 부왕께 이 일의 자초지종을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덕왕은 이 산을 ‘약수를 갖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재약산(載藥山)이라 이름을 내리고, 그 샘을 신령스런 우물이라 하여 영정(靈井)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는 지금의 표충사 자리에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영정사(靈井寺)를 지어 이 산과 신령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실제로 재약산에는 1백여 종의 약초가 자생하고 있어 ‘약재의 보고‘로 불리워지고 있다.
한편 천황산이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그들의 천황을 떠 받들기 위해 억지로 붙인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전국의 여러 곳에 산재한 천왕봉이라는 이름과 같이, 제정일치시대의 천왕(天王), 천왕랑(天王郞), 천군(天君)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초기 언양 일대에 있었던 거지화도 그 신읍(神邑)의 우두머리였던 제주(祭主)를 천왕 또는 천왕랑이라 하였다. 그 신을 받드는 제단은 흔히 산꼭대기에 있으므로 천왕당, 상왕당, 선왕당이라 하고, 이것이 변하여 서낭당이 된 것으로 본다.

영해해련김해해(寧海海連金海海)
양산산접울산산(梁山山接蔚山山)

영해 바다는 김해 바다에 연이었고
양산 산은 울산 산에 닿았네
고려 때의 어느 승려가 재약산에 올라 읊었다는 시구이다.
지내리(池內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계화석리(戒火石里)라 하였고, 정조 고종 때는 지내동이라 하여 하북면(下北面)에 속하였다. 일제 때인 1911년과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도 역시 지내리라 하였다. 본래 큰 못 안쪽이므로 ‘못안‘이라 불리던 곳으로 못안=지내(池內)가 된 것이다. 신리(新里)와 대리(大里) 두 행정마을이 있다.
가블돌말:계화석리(戒火石里)
지내리의 예종 때 이름이다, ‘계(戒)‘의 고지명 용례를 보면, 개(皆)와 마찬가지로 신(神)·왕(王)의 뜻인  ·금·검의 상반절음(上半切音)인 ‘ ‘, 또는 그 전음(轉音)인 ‘그·거‘에 사용되고 있다.
울산 계변성(戒邊城)과의 대응관계를 보면, 神 戒 皆로 되어 戒가 神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화(火)‘는 벌, 불과 같은 광명을 뜻한다. 광명을 의미하는  이 ‘ㄹ‘ 음이 약차(略借)된 것에 백(白)·박(朴)이 있고, ‘ㄱ‘ 음이 숨은 것에는 八·鉢·伐·弗 등이 있다. 이것이 사음(寫音)되어 전(轉)하여 ‘부르‘로 되어서는 毘盧·夫老·飛來·風流·白鹿·盤龍·盤若 등으로 차자되었다.
따라서 계화는 우리말의 ‘가블‘이 되며, 신명(神明)한 암석, 또는 신명한 들의 뜻을 가지게 되어 명암(鳴岩)과 같은 설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계화석=가블돌을 못안으로 비정한데는 명암설화·명동(明洞)·붉은디기 등의 잔영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안에 불을 경계하여 밭으로 남겨두었던 일 등을 참고하였다.
골재
지내리 대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谷)에서 온 이름인데, ‘골+에(처소격조사)‘에 사이 ‘ㅅ‘ 이 작용하여 골새가 된 것이다. ‘골‘은 골=읍(邑), 골=동(洞), 골=곡(谷, 산골)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남은재(南隱齋)
지내리 대리 동쪽에 있는 재실로 조선조 때 선비 정택(鄭澤)을 모신다.
능산고개
지내리 섬곡에서 향산리 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달기고개
지내리 신리 북쪽에서 언양읍 다개리 영구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당숫골
지내리 붉은디기 동쪽 골짜기로 당수나무가 있다.
대리(大里):큰 마을
지내리의 행정마을이다. 지내리에서 가장 크다. 명동(明洞)·골새·둙은디기·하동 등 자연마을이 있다.
딧갓꽁지
지내리 딧갓에 있는 산 모퉁이로 지형이 꼬리처럼 길게 뻗어있다.
땅고개
지내리 신리 동북쪽에서 언양읍 다개리 굼딱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다.
말랑몰
지내리의 대리 남쪽 등성이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등성이=몰랑(말랑)이 된 것이다. 혹은 옛날에 여기서 말을 타고 놀았다 하여 말랑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맹맹이바위
지내리의 북쪽 언양읍과의 경계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바람이 불면 맹맹하는 소리가 나므로 명암(鳴岩) 또는 맹맹이바위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마을 이름도 ‘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명동(明洞)
지내리의 대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밝고 명랑한 마을을 지향하기 위한 이름이라 한다.
명암(鳴岩):울바위:못안:지내(池內)
지내리의 자연마을이다. 못안못이라 부르는 저수지의 안쪽에 있으므로 지내(池內)라 한다. 지내보다 못안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명암=울바위를 뜻하며, 마을 뒤에 있는 맹맹이바위가 바람이 불면 맹맹하고 울므로 바위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명암이라 하였다.
못안못:큰 못:외송제(外松堤):다개못:파두못
지내리 못안 앞에 있는 큰 못으로 다개못, 파두못이라고 부른다. 신라 때의 못이라 전해 오고 있다. 둘레 2,800자, 깊이 10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수량이 많지 않다. 이 못안못 붕어는 누런 색깔인데, 옛부터 어린아이의 약용이나 어른의 보신용으로 애용되었다. 따라서 직업적으로 붕어잡이를 하는 낚시꾼도 있었다.
물탕골(2)
지내리의 소부댕이 서쪽, 대리 북쪽에 물탕골이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두 군데 있다. 물탕이 있는 곳이다.
방갓만당이
지내리 대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방갓처럼 생겼다 한다.
붉은디기
지내리의 대리 동남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이 곳의 흙이 붉기 때문이다. ‘디기‘는 ‘덕‘의 방언이다.
상천배미:향천논
지내리 신시리비알 서쪽에 있는 논이다. 옛날 언양고을의 향청(鄕廳)에 딸렸던 논이다. 향청 향천 상천이 된 것이다. 또 배미는 이두식으로 표기할 때는 ‘야미(夜味)‘라 하였다.
새마을:신리(新里)
지내리 대리의 북편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마을 또는 신리라 한다. 재궁곡(齋宮谷)과 말랑몰의 두 자연마을이 있다.
새뫼못:초산제(草山堤)
지내리에 있는 못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못안못으로 비정된다. ‘초(草)‘의 고음(古音)은 ‘새‘로도 읽었다. 가령 초점(草岾)은 오늘의 새재(鳥嶺)이다.
섬곡
지내리의 자연마을로 이름의 내력은 확실하지 않다.

소부디이:소부당(巢父堂)
화장산 기슭을 소부디이라 한다. 중국 고대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에 관한 신화를 연결시킨 이름이다. {언양읍지}에는 화장산(花藏山)위에 소부당(巢父堂)이 있다 하였고, 못안에서는 화장산을 소부당산이라 부르고 있다.
소부당의 ‘당‘은 곧 ‘골(谷)‘을 나타내는 말로 보이는데, 谷의 고훈(古訓)이 ‘실‘이면서 한편 ‘ ‘이었기 때문이다. 이 ‘ ‘의 차자로 堂·呑·屯·頓·丹 등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소부당은 소부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울산지방에서도 이 ‘당(堂)‘을 어미로 하는 지명이 많다.
송락골
지내리에 있는 골짜기로 산전리의 송락골 부근이 된다.
신시리비알
지내리 섬곡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이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용바우
지내리 섬곡 서쪽에 있는 논이다. 이 논 가운데 우뚝솟은 바위를 용바우라 한다. 내력은 알 수 없다.
장구배미
지내리 섬곡 앞에 있는 논으로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
쟁골:재궁곡(齋宮谷)
지내리 새마을의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곳에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재실이 있었으므로 재궁골이라 한다. 재궁골이 줄어서 쟁골이 되었다. 혹은 재인(才人:특별한 기술을 가진 광대나 박수 등)이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장인(匠人:쟁이)이 살았으므로 재앵골-쟁골이라 했을 수도 있다.
지내리 고인돌 등 문화유적
지내리 일원에는 다른 곳 보다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명동 마을 앞 경작지와 고헌산 남쪽 끝자락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다. 또 신리 마을 북쪽 능선 하단부에 삼국시대 고분군, 재궁골 능선 사면부에 삼국시대 유적, 재궁곡 북쪽 야산 일대에 삼국시대 고분군, 명동 마을 북쪽 능선에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유적, 명동 마을 진입로 왼쪽 능선에 삼국시대에 파괴된 고분군 등이 분포하고 있다.
하동(下洞)
지내리 붉은디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내리의 맨 아래 마을이다.

천전리(川前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으며, 상남면에 속했다. 일제 때인 1911년과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도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1928년 4월 1일 하북면과 상남면이 합하여 상북면이 되자 여기에 소속되었다.
남천(南川)의 상류인 만당걸이 마을 앞을 흐르므로 ‘내앞‘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천전리‘가 된 것이다. 행정마을은 천전1리와 천전2리로 나누어져 있다.
갱빈들
천전리의 동쪽에 있는 들로 냇가에 있으므로 갱빈(강변)들이라 한다.
과부성:시루성
천전리와 등억리에 걸쳐있는 산성이다. 주위가 1.5km이지만 대부분 허물어졌다(등억리의 과부성 참조).
굴방우
천전리 서북쪽 길천리와 경계에 있는 바위로 바위 아래에 굴이 있다.
끝각단
천전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전리 마을의 끝이 된다.
도랑각단
천전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도랑가에 있다.
만당들:만당평(萬堂坪)
만당은 천전과 지화리 등에 걸쳐있는 들이다.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와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 때 그 치소(治所)가 만당들에 있었다 한다. 옛날 만여 채의 집이 있어서 만당이라 부른다.
봉화산(烽火山):봉수산:부로산(扶老山)
천전리·등억리와 삼남면 교동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 351m이며 옛날에 봉수대가 있었다.
부리보(浮里洑):부로보:우로보:봇디미
천전리에 있던 보이다. 원래 부로보(浮老洑)라 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우로보(于老洑)라 하였다. 남쪽 기슭의 산이 부로산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신작로로 변했다
수옥정(漱玉亭)
천전리에 있는 정자이다. 조선조 때 진사 최남복(崔南復)이 세웠다. ‘수옥(漱玉)‘은 옥을 씻는다는 뜻이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을 비유한 것이다.
예시밧골
천전리 어붓골 서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예시(여우)굴이 있었다.
용화사(龍華寺)
천전리 북쪽에 있는 절이다. 신라 미추왕 때 청앙대사가 창건했다 한다. 이 곳에 천전석불(미륵)이 있다.
웃각단
천전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쪽이 된다. ‘각단‘은 마을을 뜻한다.
작답들
천전리 만당들의 끝을 작답들이라 한다. 새로 개간하여 논을 만들어 ‘작답(作畓)‘하였다는 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중간각단
천전리에 있는 마을로 웃각단과 끝각단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천전리 고분군
천전리 서쪽 약 300m 거리의 산 기슭에 8∼9기가 분포하고 있다. 직경 약 10m의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도굴되고 지금은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남았을 뿐이다.
천전석불(川前石佛):미륵
천전리 용화사(龍華寺)에 있는 미륵불이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현역군인이라 할 번상군(番上軍) 복무를 위한 경비를 염출하기 위해 번상하지 않는 양인으로부터 군포(軍布)를 징수하였다. 이 제도는 후에 국방보다는 국가재정 충당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었다. 군역의 대역세로서 포 2필을 바치게 했는데, 군포를 바치지 않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대신에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웃 사람이나 친척에게 부과하는 인징족징(隣徵族徵), 아이를 어른이라 하여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僉丁),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의 악폐가 생겨났다.
어느 해 언양현감이 군포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 장정들의 이름을 적었는데, 이 곳에 있는 미륵을 장정수에 포함시켰다. 그 후 관아에서는 장정의 수효대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혹독하게 군포를 거두어 들였다. 인징족징이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dq석불을 장정에 포함하여 그 피해가 우리 백성들에게 미치는구나%dq 하고 탄식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홀연 석불의 어깨 위에 두 필의 면포가 얹혀졌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영험한 미륵이라 하여 1843년(현종 14) 용화사를 세우고 석불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이 미륵석불 앞에 지극한 정성을 드렸고, 소원을 빌면 효험을 얻었다 한다.

향산리(香山里)
상북면 13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향산‘은 마을 뒤의 작약봉에서 풍기는 향기가 높다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고종 때는 능입(陵入)이라 하여 하북면에 속했다. 일제 때인 1911년에 능산(陵山)과 향산(香山)으로 나누어졌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마을을 합하여 향산리라 하였다. 1928년 4월 1일 하북면과 상남면을 합하여 상북면이 될 때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도 향산과 능산 두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갱빈각단
향산리 능산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마을이 냇가(강변)에 있으므로 갱빈각단이라 한다. 각단은 마을을 뜻한다.
능구(陵口)더미
향산리 능산 마을에서 위열공의 묘소로 넘어가는 화장산을 능구더미라 한다. 능구(陵口)=능입(陵入)은 모두 같은 말이다. 곧 위열공묘 입구라는 뜻이다.
능입(陵入):능산(陵山)
향산리의 행정마을이다. 조선조 말의 기록에는 능산을 능입이라 하여 향산까지 관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능산이나 능입은 언양출신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묘가 화장산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위열공은 벼슬이 시중(侍仲:수상)이라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언양읍지}에는 그의 묘를 능묘조에서 다루고 있다. ‘능산‘은 1911년부터 고쳐 부르는 이름이다. 안마을·웃마을·갱빈각단·양달마실·아리몰 등 자연마을이 있다.
베락방우
향산리 정장군묘의 서쪽 산중에 있다. 벼락이 쳐서 깨졌으므로 베락방우라 한다. 이것을 고인돌로 보기도 한다.
세이골:세이곡(洗耳谷)
향산리 화장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 세이지(洗耳池)라는 못이 있으므로 ‘세이골‘이라 한다.
세이지(洗耳池):천지(天池):유지(油池)
향산리의 화장산 세이골에 있는 못이다. 중국의 요(堯) 임금과 소부(巢父)·허유(許由)의 고사에 나오는 소재를 못 이름으로 하였다.
패택(沛澤)이라는 곳에 허유라는 고결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바르지 않은 자리에는 애당초 앉지 않았고, 까닭없는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으며, 오로지 의(義)를 지키며 살았다. 허유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요 임금이 그를 찾아가 천하를 물려줄 터이니 받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허유는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dq이렇게 훌륭하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을 두고 어찌 나 같은 자가 대신 옥좌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 같은 작은 그릇이 어찌 넓은 천하를 맡겠습니까?%dq 하고는 기산(箕山) 밑을 흐르는 영수(潁水) 근처로 가버렸다.
요 임금이 다시 그를 따라가서 %dq그렇다면 구주(九州)라도 맡아 달라%dq고 청하였다. 허유는 이를 다시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dq구질구질한 말을 들은 내 귀가 무척 더러워졌을 것이다%dq 하면서 자기의 귀를 영수의 흐르는 물에 씻었다.
이 때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앞세우고 어슬렁거리며 오던 소부가 허유에게 묻기를, %dq왜 강물에 갑자기 귀를 씻는거요?%dq 하였다. 허유가 대답하기를 %dq요 임금이 와서 내게 천하나 구주를 맡아달라고 하기에 내 귀가 더럽혀졌을까 하여 씻는거요%dq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소부가 목청껏 크게 웃어댔다.
허유가 민망하여 소부에게 웃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소부는 %dq은자(隱者)랍시고 세상에 소문을 퍼뜨려 요 임금이 찾아오게 하여 그런 낭패를 당한 것이요%dq 하였다. 그리고는 망아지를 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을 먹이며 말하기를 %dq그대의 귀 씻은 구정물을 내 어찌 망아지에게 먹일 수 있겠소. 그래서 위로 올라온 것이오%dq 하였다. 뒤에 허유가 죽자 요 임금은 그를 기산 위에 묻고, 무덤을 기산공신(箕山公神)이라 하였다.
{언양읍지}에는 화장산에 세이지와 소부당이 있다 했는데, 향산쪽에 세이지가, 지내리에 소부당이 있다. 능산 마을 뒷쪽 화장산 위에 있는 천지못이 바로 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이름을 가진 세이지이다.
천지못(天池)은 높은 산상에 있으므로 백두산 천지에 비유한 듯하다. 위열공 묘를 풍수지리상 등잔혈(燈盞穴)이라 하며, 이 세이지의 물이 등잔의 기름 역할을 하므로 기름못, 즉 유지(油池)라 부른다. 이 못은 사철 마르지 않는다.
이팝나무
향산리에 있는 노거수이다. 수령이 200여 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둘레는 약 2m이다. 이팝나무는 희귀하여 보기 드문 나무로 알려져 있다. 물푸레과에 딸린 교목으로 산야에 자생한다. 봄철에는 나무 전체에 흰 꽃이 덮여 은은한 향기가 널리 퍼진다.
표절사(表節祠)
향산리에 있는 사당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하여 순절한 좌랑공 정대업(鄭大業)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표절사라 하였다. 그의 묘소도 이 곳에 있다.
향산(香山)
향산리의 행정마을이다. 향산은 마을 뒤 산봉우리가 작약봉(芍藥峰)이므로 그 작약에서 풍기는 향기가 높다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작약봉은 웃마실 뒤에 있는 산으로 ‘함박등‘이라고도 한다. 함박등은 광명(光明)이나 국토를 뜻하는 옛말 ‘한 ‘에서 온 이름이다.
향산 고인돌
향산리 정대업장군 묘 앞에 있는 돌로 정장군이 들어다 놓았다 한다. 정장군이 오줌을 누었더니 돌덩어리가 파여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또 길을 확장할 때 이 돌을 깨어 없애려 하였으나 정씨 문중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이 돌을 고인돌로 추정하기도 한다. 작약산 끝자락의 자지봉 일대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윗면에 성혈(性穴)이 있다.
호묘(虎墓):동래정씨 정려각(旌閭閣)
향산리 능산에 있는 옛 무덤이다. 조선시대 능산 마을에 금슬이 좋은 정씨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인이 나이 스물 여섯이 되었을 때 남편이 아들 하나를 둔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청상이 된 부인은 죽은 남편의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 부인이 온갖 고초를 참으면서 시묘를 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부인을 지켜주었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덫에 걸린 호랑이를 잡으려 하기에 부인이 가보니 바로 그 호랑이였다. 부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여 호랑이를 살려주었다.
그 후 호랑이는 계속해서 부인을 보호해 주고, 또 부인을 등에 태워 움막으로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3년의 시묘살이를 한 후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부인이 묘 앞에서 슬피 울자 묘의 한 가운데가 갈라졌다. 이 때 부인이 묘 속의 남편 곁으로 가서 눕자 무덤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저절로 합장이 되어버렸다. 그 뒤 합장된 무덤 앞에 호랑이마저 죽어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부인의 아들이 호랑이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을 호묘(虎墓)라 한다.
이 곳의 동래정씨 정려각은 조선 태종 때 정려되었다.
화장산(花藏山)
향산리와 언양읍 송대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 곳에 고려 때 시중을 지낸 위열공 김취려의 묘소가 있다(언양읍 송대리 화장산과 화장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