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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생 면(西生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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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작성일 2004-03-27
서 생 면(西生面)


면의 위치와 자연
서생면은 울산광역시와 울주군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남쪽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서쪽은 기장군 장안읍 및 울주군 온양읍, 북쪽은 울주군 온양읍·온산읍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울산만의 동해바다이다.
면의 북쪽은 회야강이 동류하면서 온산읍과 접하고, 또 양산시에서 발원한 효암천이 사행을 이루며 동 서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또 용곡산 줄기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남쪽은 Y자형 곡저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쪽은 해안 곳곳에 해안단구 및 해식애가 발달되어 있다. 면의 서쪽을 동해 남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다.
동해안 남부에 위치한 서생면 지역은 이런 지리적 성격으로 인해 신라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우리 나라 해안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그 역사가 매우 깊은 곳이다.

면 이름의 유래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동안군(東安郡)조에 %dq본시 생서량군(生西良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동안군(東安郡)으로 개명하였다. 지금(고려 인종때)은 경주에 합하였다. 영현은 하나이다. 우풍현(虞風縣)은 본래 우화현(于火縣)으로 경덕왕이 우풍(虞風)으로 개명하였고, 지금은 울주(蔚州)에 합했다%dq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 권 32, 제사지 소사(小祀)조에 %dq우화(于火)는 생서량군(生西良郡) 우화현(于火縣)에 있다%dq고 명기하고 있다.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웅촌면과 웅상읍은 본래 우화현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이르러 우풍현(虞風縣)으로 개명한 것이 분명하다. 또 소사(小祀)의 하나인 우화도 지금의 웅상읍 우불산(于弗山)을 가리키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동안군을 고려 인종 때 경주에 합했다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동안군의 위치를 막연하게 경주 부근으로 짐작해 왔다. 그러나 이 경우 우풍현이 북쪽으로 울주(蔚州)와 언양현(彦陽縣)의 넓은 관할을 뛰어 넘어 경주 부근의 한 지역에 속한 현(縣)이 되므로 이러한 행정조직은 있을 수 없다.
한편 {대동지지}는 동안군을 %dq울산의 남쪽 50리 지점에 있는데, 본래 신라의 생서량(生西良)이며, 고려 현종 9년에 울주에 합하였고, 조선에 와서 서생포진(西生浦鎭)을 설치하였다%dq고 했다.
{울산박씨세보}에서도 울주의 남부지방인 온양읍과 온산읍은 물론 서생 지방까지 동안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서생면의 서생(西生)에서 울주의 온양·온산일대가 생서량군(生西良郡)이었던 것을 동안군으로 개명하였으니, 접경한 우풍현이 그 영현이었다는 것도 지리적으로 맞다.
서생(西生)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서(西)‘는 사(沙)·살(薩)·차(嵯)·사(斯) 등과 같이 고음(古音)이 ‘셰·새‘인 것으로 보며, ‘생(生)‘은 ‘나·내‘가 되어 벌이나 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생(西生)이나 생서량(生西良)·동안(東安)은 모두 밝아오는 동쪽 들을 뜻하는 ‘새내‘ 곧 요량(曉良)·서량(曙良)의 뜻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면의 연혁
울주군 12개 읍·면 중의 하나인 서생면은 신암리(新岩里)에 일찌기 신석기시대의 선사인(先史人)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즐문토기유적(櫛文土器遺蹟)을 남겨 놓았다.
이 곳 화정리는 본래 서사포(西舍浦)라 하던 곳으로, 신라초기에 생서량군(生西良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동안군(東安郡)으로 개명하였다. 동안군의 관할은 울주군의 서생·온양·온산 등지에 미쳤으며, 웅촌(熊村)·웅상(熊上) 지방이었던 우풍현(虞風縣)을 그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또 조선 초부터 화정리에 서생포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두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명군의 반격을 받은 왜군이 패퇴하여 남쪽 해안지방으로 물러서면서 1593년(선조 26)에 왜성(倭城)을 쌓았다가 물러갔다. 임진왜란 뒤에는 수군만호를 승격하여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를 서생포 왜성에 머무르게 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이를 폐지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온양읍의 수마동(술마:화마동)과 외남면의 나사·명산 등을 합하였다. 1962년 동래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에 다시 울주군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0개 법정동리, 22개 행정마을, 26개 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나사리(羅士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 나사리라 하였다가, 1894년(고종 31) 외남면에 속할 때 나사와 나해(羅海) 두 마을로 나누어졌다. 1914년 울주군에 편입되었고, 1962년 동래군으로 옮겨졌다가 196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 다시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나사리의 ‘라(羅)‘는 고지명상에 흔히 나타나는 노(奴)·나(那)·야(耶)·노(盧)·내(壤)·라(良)·락(洛)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대개 국읍(國邑)이나 토지를 뜻하는 말이다. 또 ‘사(士)‘는 ‘골(谷)‘이 변해서 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옛말에 골을 ‘실‘이라고도 하였는데, ‘실‘이 실(絲)로 전(轉)하고, 실(絲)은 ‘사(絲)‘이니, ‘사‘가 다시 ‘사(沙)‘ ‘사(士)‘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라(羅)‘를 ‘불‘로 볼 수도 있다. 바닷가의 넓은 사빈(沙濱)을 이 지방에서는 ‘불‘이라 한다. ‘불‘은 伐·火 등과 같은 용도로 쓰여졌다. 이 경우 나사(羅士)는 ‘불골‘이 된다. 나사에 ‘불안‘이란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간다. 행정마을도 나사 하나로 되어있다. 나사마을 남쪽 바닷가 구릉지에서는 신석기시대 및 삼국시대의 토기,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나사방파제(羅士防波堤)
나사리의 서남쪽에 있는 방파제로 1943년에 쌓았다.
나사봉대(羅士烽臺):봉대산:이길곶봉수대(爾吉串烽燧臺)
나사리의 마을 뒷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이다. 이 곳에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의 아리포(阿爾浦) 봉수대에 응하고, 북으로는 온산읍 강양(江陽)의 하산(下山) 봉수대에 응하였다.
이길(爾吉)이라는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다. ‘이(爾)‘는 ‘넓(廣)‘의 약음 ‘너‘로 보이며, ‘길(吉)‘은 ‘길(永·長)‘의 차음(借音)으로 볼 수 있다. ‘곶(串)‘은 육지가 바다로 튀어나온 곳을 말하니, 산이 넓고 길게 튀어나온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간절곶(艮絶串)이라 하는데, 이는 간짓대처럼 길게 튀어나온 간질곶(竿永串)이 변한 말이다.
부안(富安):불안
나사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넉넉하다 하여 부안, 불안이라 부른다 한다. ‘불안‘은 ‘불-바닷가‘의 사빈(沙濱)을 말하므로 ‘모랫벌 안쪽 마을‘을 뜻한다.
은방골
나사리의 부안 뒷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은이 났던 곳이다.
항계못
나사리의 동북쪽에 있는 못으로 1943년에 설치하였다. 항교에 딸린 논에 물을 댔다. ‘항계못‘은 ‘항교못‘이 변한 것이다.
혈찌골
나사리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헐치기(방언, 언청이를 뜻함)처럼 생겼다.
호양지 골짝
나사리의 나사봉대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화냥질하다가 죽은 여자의 무덤이 있었다. ‘화냥질‘ 골짝 호양지 골짝으로 변했다.

대송리(大松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서생면의 송정동(松亭洞)과 대륙동(大陸洞), 외남면(外南面)의 평동(平洞)을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대송(大松)은 대륙동의 대(大)와 송정동의 송(松)을 딴 절충식 합성지명이다.
1962년 동래군, 1963년 양산군, 1983년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대송리의 대송분교 부근에서는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토기편과 유적이, 평동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와 유적이 발견되었다. 송정(松亭)·대송(大松)·평동(平洞) 세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간질끝:간절갑(艮絶岬):간절압(竿切―), 간절곶(艮絶串)
대송리의 동쪽 끝에 있는 곶이다. 동해안의 유명한 돌출지이다. 먼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이 곳을 바라보면 지형이 긴 간짓대처럼 바다로 길게 뻗었으므로 간질끝이라 부른다.
간절갑은 일본식 지명이다. ‘갑‘이란 일본인들이 속훈자를 붙여 만든 말이므로 우리말대로 ‘간절곶‘이라고 해야 옳다.
이 곳에 1920년에 세운 간절곶 등대가 있다. 근래에 철도청에서 간절곶 해맞이를 위한 관광열차를 운행하고, 울산시에서 새해 해맞이 행사를 개최하는 등 전국적인 명소가 되고 있다.
국립천문대에 따르면 간절곶은 2000년 1월 1일의 새 천년 해뜨는 시각이 오전 07시 31분 17초로 경북 포항의 호미곶보다 1분 4초,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보다 7분 35초나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대송(大松):대길(大吉):대륙
대송리의 행정마을이다. 대송을 대길(大陸)이라고도 하며, 이는 너길(爾吉)과도 같은 말이다. ‘大‘는 산(山)을 이르니, 산의 고훈(古訓)이 ‘대‘이기도 하였으므로 그렇게 쓴 것이다. ‘陸‘은 훈(訓)을 ‘길‘이라고도 하므로 ‘길다(長)‘의 차자이다. 그러므로 대길동(大陸洞)은 간질 끝의 지세를 형용하여 산이 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대포(大浦)
대송리의 송정과 평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큰 개‘ 라는 뜻이며, 큰 개의 옆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초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하였다.
‘이(爾)‘의 뜻은 ‘넓‘이며, ‘길(吉)‘은 ‘길(永)다‘는 말의 차음(借音)이니, 넓고 길게 튀어나온 곶이라는 뜻을 지녔다. 또 간절곶이라고도 한다. ‘간(竿)‘은 간짓대를 의미하며, ‘절(切)‘은 길다의 방언 ‘질‘의 차음이다. 즉 간질곶은 간짓대처럼 길게 나온 곳이라는 뜻이다. ‘곶‘은 육지가 바다나 강쪽으로 돌출한 곳을 말한다.
독바우
대송리의 평동 남쪽에 있는 바위로 독(항아리)처럼 생겼다.
매갱이
대송리의 평동 남쪽에 있는 바위로 매갱이(물고기의 한 종류)가 많았던 곳이다.
새우덤
대송리의 간절끝에서 가장 튀어나왔던 해중암이다. 근래에 이 바위를 폭파하여 제거함으로서 뱃길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송정:재골:재앳골
대송리 행정마을의 하나이다. 송정(松亭)은 골짜기가 솔기(좁기) 때문에 솔다(陜)는 뜻을 가진 마을이었으나, 이 ‘솔(陜)‘이 ‘솔(松)‘로 뜻이 변해서 송정(松亭)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송정(松亭)보다는 재골로 더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기와를 구웠으므로 재골(瓦谷)이라 불러온다.
평동(平洞)
대송리 행정마을의 하나이다. ‘평(平)‘은 평평한 넓은 들을 뜻하는 글자로 썼다. 이는 평(坪)과 같이 들판을 의역(義譯)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동(平洞)은 평평하고 너른 들동내라는 뜻이다.
학해집 앞
대송리 송정 남쪽에 있는 바닷가 모랫벌이다. 옛날에 학해라는 이의 집 앞을 의미한다.

명산리(明山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외남면에 속한 지역으로 정조 때는 강월리(江越里)라 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강월·연산(延山)·용동(龍洞)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용동의 용연(龍淵)을 합하여 명산리라 하고 서생면에 편입하였다.
1962년에는 동래군, 1963년에는 양산군, 1983년에는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강월(江月)·연산(연산)·용연(龍淵) 세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강월(江越)·강월(江月)·강월내
명산리의 행정마을이다. 연산 남쪽 마을로서 하민등(연산)에서 보면 달이 뜨는 마을이라 하여 강월(江月)이라 한다. 또 효암강(孝岩江)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므로 강월(江越)이라 하다가 뒤에 강월(江月)로 아화(雅化)된 것이다.
혹은 이 곳 지형이 풍수지리상 강구농월형(江龜弄月形:강의 거북이가 달을 가지고 노는 형국)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서생면 지역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는 지역으로서 강월 마을도 그 속에 포함돼 있다.
기암(旗岩)
명산리의 용연(龍淵) 마을 뒷산에 우뚝 선 바위이다. 조선 초에 어떤 풍수지리가가 서생면의 여러 곳을 답사한 뒤에 서생(西生)을 군수 대좌혈(軍帥大坐穴)이라 하였다. 신암(新岩)의 군경포(軍警浦), 나사(羅士)와 용리(龍里)의 홍문가(紅門街), 용연(龍淵)의 기암(旗岩), 효암(孝岩)의 낙음(樂音), 서생리(西生里)의 탄금암(彈琴岩)과 장군암(將軍岩) 등은 다 군수대좌 형국을 이루어 주는 이름이라 풀이하였다 한다.
모리각단
명산리의 연산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모퉁이 모롱이 모리각단으로 변했다.
무학들(舞鶴野)
명산리의 연산 남쪽에 있는 들이다. 신암리의 무학산 앞이 되므로 무학들이라 한다.
안장골
명산리의 곰지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말의 안장처럼 생겼다.
연산(連山):연산(延山)
명산리의 행정마을이다. 고종 때는 연산(延山)이라 하다가, 1914년 기록에는 연산(連山)으로 나타난다. 산의 경사진 꼴이 완만하므로 연뫼(延山)라 한다. 이러한 곳에는 흔히 늘어진 산을 뜻하는 늘뫼란 이름도 붙는다.
한편으로 해민등(海岷嶝) 또는 하민등(下岷嶝:아리민등)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화산(禾山)을 민등(禿嶝)이라 한데 대한 대칭(對稱)이기도 하다. 민등은 나무가 없는 불모산을 말한다.
용연(龍淵):용수불
명산리의 맨 위쪽에 있는 마을로서 행정마을이다. 위쪽에 용방우(바위)가 있고, 또 용송도 있었다. 1894년(고종 31) 용동이라 하였으나 1914년 용리라 하였다. 용이 멱을 감았다는 용연(용못)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용의 골
명산리 곰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서 용마(龍馬)가 났다 한다.
장성배기, 장성배기샘
명산리 용의골 밑에 있는 골짜기와 샘이다. 옛날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던 곳이다. 이 샘은 물이 잘 나기로 유명하였다.
짱바탱이
명산리 용연 뒷쪽에 있는 버덩으로 짱을 치면서 놀았던 곳이다.

서생리(西生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서생리는 정조 때 서생리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는 북동(北洞)과 남동(南洞), 1911년 성내동(城內洞)과 외리동(外里洞)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서생리(西生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은 옛날에 서생포·서사포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서생포영이 있었다.
1962년 동래군, 1963년에는 양산군, 1983년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행정마을도 서생 하나로 되어있다.
객사터(客舍-)
서생리 동헌터 북쪽에 있는 옛 건물터이다. 조선시대에 수군첨사영(水軍僉使營)의 객사가 있었다.
관청샘
서생리 동헌터 앞 길가에 있는 샘으로 수군첨사영에서 우물로 사용하였다.
군관청터(軍官廳-)
서생리 303번지에 있는 옛 관청터이다. 조선시대 수군첨사영의 군관청이 있었다.
깨묵거랑:포항천(浦項川)
인성암 뒷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도둑굼 앞개를 지나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내이다. ‘개목(포항)거랑‘이 ‘깨묵거랑‘으로 바뀐 것이다.
남문걸, 남문밖, 남문터, 남밖
서생리의 옛날 서생포 첨사진성의 남문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다. 남문걸=남문 근처, 남밖=남문 밖을 말한다. 남문은 서생리 321번지에 있었다.
대문래:폐문래, 폐문루, 월대, 폐문루터
서생리의 서생 복판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망을 보던 문루가 있었다.
덕곡(德谷):떡고개:떡국재
서생리에서 신암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떡고개·떡국재‘는 ‘덕곡‘의 방언이다. 말이 울었다는 뜻으로 명마령(鳴馬嶺)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덕곡은 ‘큰 골‘을 뜻하는 이름이다.
도독동(都督洞), 도독동굴, 도둑굼, 도둑굼들:도둑꾸매
서생리의 도독굼을 말한다. 이 곳의 굴에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서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운 마귀(麻貴)와 그의 아장 편표(片彪)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용략위덕대진비(勇略威德大振碑)}라는 비가 있었다. 마귀의 직함인 ‘도독‘을 딴 것이다. 마귀와 편표가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한때 이 곳에 주둔하였다.
동문걸, 동문터
서생리 서생성의 동문(東門) 근처에 있는 마을을 동문걸이라 한다. 서생리 46번지의 5가 동문터이다.
동헌터(東軒-):서생면사무소터:서생포영터
서생리의 서생성 동헌터이다. 이 곳은 수군만호진(수군동첨사진)의 첨사가 집무하던 곳이다. 뒤에 서생면사무소가 되었다가 신암리로 옮겨갔다.
북문걸(北門-), 북문터
서생리의 서생성 북문근처 마을이 북문걸이다. 서생리 481번지에는 서생성의 북문이 있었다.
서문터(西門-)
서생리에 있는 서생성 서문터이다.
서생(西生), 서생성(西生城)
서생리 서남쪽에 있는 고적이다. 사적 제 54호로 지정된 문화유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무풍지대처럼 북상하여 불과 2개월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이 땅을 유린하다가,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593년(선조 26)에 이르러 서생포에서 순천(順天)에 이르기까지 18개 성첩(城壘)을 쌓았다. 이 서생포 왜성은 그 때 가또오 기요마사와 아사노 유기나가가 쌓았다.
이 때 왜군은 축성과 수량(收糧)의 계획을 세우고 남해안의 요지를 기점으로 해서 장차 한강 이남의 4도를 차지할 계획이었다. 그 후 조·왜 양국간의 화의교섭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휘하 군관으로 있던 장희춘(蔣希春)과 이겸수(李謙受)가 서한을 가지고 서생포성에 들어가 가또오 기요마사를 달랬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울산의 의병장이었다.
서생포 왜성은 진하해수욕장 북쪽 마을 뒤편에 위치해 있다. 해발 200m의 산정(山頂)에 아성(牙城)을 두고, 동북의 경사진 곳에 2지환(二之丸), 3지환을 두어 밖으로 성벽을 둘렀다.
기록에 의하면, 1594년(선조 27)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와 담판하기 위해 네 차례나 이 곳을 방문했다. 석축(石築) 등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있다.
전해 오기를, 이 성은 팔문법(八門法)에 의한 축성으로서 생문(生門)이라 하여 서쪽에 한 문을 두어 출입하였다. 또 아성(牙城)을 대장단(大將壇)이라 하며,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이 있었다. 이 성은 ‘勝‘자를 묘사하여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서생‘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물러간 뒤에 서생성에 입성한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성의 축성법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dq생재서고(生在西故) 당작서생(當作西生)…%dq이라 하여, 서문으로 나간 사람은 살 수 있었으니, 서생이라 이름짓는다%dq 하여 서사포를 서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 초의 기록에 이미 서생포만호(西生浦萬戶)라는 직함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마귀(麻貴)의 말에 따라 지칭하였다는 설은 단지 명나라 장수의 권위를 빌려 서생성을 더 신비스럽게 하려는 작위에 지나지 않는다.
화정리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두어 만호가 바다를 지키면서 이 일대의 행정을 전담하게 되니 그 관할 구역을 다 서생포라 불렀다.
임진왜란 뒤에 만호진을 없애는 동시에 만호를 종4품직인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로 승격시켜 왜성 안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므로 서생포라는 이름도 화정(禾亭)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오게 됐다.
서생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고찰하면, ‘서(西)‘는 사(沙)·살(薩)·차(嵯)·사(斯)와 같이 넓은 들을 뜻한다. 그러나 고음(古音)이 ‘셰‘ 또는 ‘새‘인 것으로 보아 서생은 동방 또는 새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생이나 생서량·동안은 다 ‘새내(曉良·曙良)‘의 뜻을 가진다.
다음은 명종∼선조조 문신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이 읊은 서생포성 풍경이다.

밤중에 군사 몰고 서생포성에 이르니
반딧불 같은 푸른 횃불이 나를 인도하는구나
대청 마루에 누워도 잠을 못 이루는데
차거운 밀물소리는 베개머리까지 들려오네
쓸쓸한 남쪽 바다 이 곳 서생포성까지
날마다 달리고 또 달려서 찾아왔네
고향집 가는 꿈을 꾸고 깨고 하는데
한밤중 고각소리는 불길하게 들리네

성안:성내(成內), 성밖:성외(成外):외리(外里)
서생리의 서생성을 중심으로 성 안쪽을 성내·성안이라 하고, 그 밖을 성밖·외리·성외라 한다.
실성산:증성산(甑城山)
서생포 왜성을 일명 외증성(外甑城)이라 한다.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증성(甑城-시루성)이라 하는데서 그 대응으로 외(外)를 붙여 외증성이라 하였을 것이다. 시리성 또는 시루성·실성이라 하는 것은 성의 형태가 시루를 엎은 것 같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시루성이 있는 산이라 하여 시루성산이라 하다가 이것이 줄어서 실성산이라 부른다.
실성산의 산신을 ‘앙금할망구(老姑)‘라 한다. 아득한 옛날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산에서 살아왔다. 산에서 채집하고 산에서 수렵하여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산에서 살게 되고, 산에서 살다보니 산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또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을 산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곳도 산정이며, 그 첫발을 내리는 곳도 곧 산정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을 믿어 그 신령의 가호를 받으며 식량등 생활의 풍요를 빌어 왔다.
실성산의 앙금할망구도 이러한 류의 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이러한 여신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난다. 지리산(智異山)의 천왕봉성모(天王峰聖母), 선도산(仙桃山)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영일(迎日)의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를 비롯하여 울산지방의 치술령( 述嶺)의 치술신모( 述神母), 두서면(斗西面) 아미산(蛾眉山)의 할망구 등이 그것이다.
실성산(甑城山)의 앙금할망구도 이 산에 진좌(鎭坐)하여 아침에는 승강어적(勝江漁笛)을 들으며, 선도귀범(仙島歸帆), 폭포비설(瀑布飛雪), 증성낙조(甑城落照)를 바라보면서 성암모종(聖庵暮鐘)에 하루가 감을 아쉬워 하였다. 또 밤이 되면 층대명월(層臺明月) 아래 도독숙로(都督宿露)를 밟아본다. 때로는 신암(新岩)의 신선바위에 몸을 날려 갈매기떼와 벗하고 서호의 임금산에 놀다 찌개바위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앙금할망구에게는 소중히 간직해 온 반지가 하나 있었다. 이 반지는 고래떼가 남극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선물로 드린 산호반지였다.
하루는 앙금할망구가 서생성의 대장단(大將壇)에 올라가서 동해의 파도와 어울려 지나가는 뱃길을 보살피다가 옆에 빼두었던 반지를 잃어버렸다. 쥐 한 마리가 오래간만에 돌 틈에서 나왔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물어 가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려 반지를 찾던 할망구는 크게 놀랐다. 누구의 장난일까 하며 법석을 떨며 찾았으나 두 손으로 땅바닥을 파헤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단(大將壇)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땅을 파헤친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 온다.

인성암(引聖庵), 성인산(聖人山)
서생리의 해운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성인산은 인성암 북쪽에 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라 한다. 절이 완성된 뒤 이름을 붙이려 할 때 절의 북쪽에 성인산(聖人山)이 있으므로 성자를 이끌어 들인다 하여 인성암(引聖庵)이라 하였다. 1927년 4월 25일에 칠성각(七星閣)을 세우고 동 27일에 부처를 모셨다.
장군바위:장군암(將軍岩)
서생리 인성암의 앞산에 있는 바위이다. 그 명칭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집게바위
서생성의 서편 산 위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가 갈라져서 마치 집게같이 생겼으므로 집게바위라 부른다. 한편으로는 이를 탄금암(彈琴岩)이라고 하는데, 가야금을 탄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탕건같이 보이므로 이렇게도 부르고 있다.
창표당터(蒼表堂-)
서생리 동헌터 서쪽에 있었던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의 여러 의사들의 뜨거운 충성을 기린 것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창표는 ‘상앙창황시조문자지신공(上仰蒼皇始造文字之神功) 하표단충초간성명지위열(下表丹忠初刊姓名之位列)‘에서 나온 말이다. 1599년(선조 32) 겨울에 세웠다.
토성터(土城-)
토성은 외리(外里) 마을에서 진하 앞들에 걸쳐 있던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또오 기요마사가 큰 돌을 초석으로 놓고 그 위에 토사로 성을 쌓아 서생포 왜성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로 진을 치고 머물렀다.
팽개자리:핑개자리
서생리의 도둑굴 남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 펀개(용두레로 물을 퍼내는 개)로 물을 퍼낸 곳이라 한다.
해운산(海雲山), 해운산 폭포
해운폭포가 있는 산을 말한다. 폭포가 쏟아지는 것이 구름 같으며 바다 가까이 있으므로 해운산이라 하게 됐다. 해운폭포는 해운산(海雲山)의 인성암(引聖庵) 어귀에 있는 폭포로 절골(寺谷)에서 발원하여 천연의 반석 위로 흐른다. 주위는 기암촉석(奇巖矗石)의 승경이다. 높이 8m에서 떨어지는 물은 약수라 하여 여기에 목욕하면 중풍이 났는다고 전해져온다.

신암리(新岩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옛날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정조 때는 군령리(軍令里)라 하였고, 1894년(고종 31)에는 군령·운곡(云谷)·신리(新里)의 3개 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들 3개 동에 효열동(孝烈洞)의 일부를 합하여 신리와 운암의 앞뒤 글자를 따서 신암리라 하고 서생면에 편입하였다. 신암(新岩)·신리(新里)·비학(飛鶴) 세 개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서생면사무소 서생중학교 서생초등학교 서생우체국 서생경찰지서 서생어업조합 등이 있다.
서생면 일대가 원자력 발전소 부지로 결정됨에 따라 신암리의 신리·비학 일대가 그 부지에 포함됐다. 비학 마을은 원자로가 설치되는 지역이라 한다.
고동돌
신암리의 진들 남쪽에 있는 바위로 고동처럼 생겼다.
골매
신암리의 신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횟집이 많다. ‘골‘은 골(谷), ‘매‘는 뫼(山)의 뜻을 가진 산골마을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시:군령(軍令)
신암리의 마을 이름으로 전해지는 명칭이다. ‘군(軍)‘은 이두 용례에 ‘꾼‘으로 쓰이던 글자이나, 고지명에는 ‘구‘의 차자(借字)로도 사용해 왔다(軍彌國(구미), {삼국지} 위지동이전).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로 읽는다. ‘령(令)‘은 이두 용례상 ‘시‘이다. 이렇게 볼 때 ‘군령(軍令)‘은 ‘구시‘가 되며 이는 ‘구이‘라고도 하는 목조(木槽)인 것이다.
지형이 굼깊어 ‘구시같다‘ 하여 구시골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지형을 흔히 구미 또는 굼이라고도 한다. 이 구시골은 골매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을 군경포(軍警浦)라고도 하였다.
대비단:대밭안
신암리 안섶자리 남쪽에 있는 바위로 대가 많이 났다.
무학산(舞鶴山)
신암리 비학 동쪽에 있는 산이다. 산 모습이 학이 춤추는 모양이므로 무학산이라 했다.
물방앗골
신암리 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뱅밑
신암리 대비단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비학(飛鶴)
신암리 새말 서남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오른쪽에 무학산이 있으며, ‘학이 날아온‘ 모양이다.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들어서는 부지이다. 마을이 집단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니 ‘날 비(飛)‘자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된다.
새말:신리(新里)
신암리 중리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서 행정마을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말 또는 신리라 한다.
서당골새
신암리 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서당이 있었던 곳이다.
송리(松里)
신암리 중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소나무가 울창했다. 동쪽 끝마을을 솔끝이라 한다.
신리 방파제
신암리의 신리 남쪽에 있는 뚝으로 1933년에 쌓았다. 길이는 136m이다.

신선암(神仙岩):신선바우:선성바우
신암리의 새말 동쪽에 있는 바위이다. 위가 넓고 펀펀한데 4∼5덩이의 큰 바위가 첩첩으로 되어있다. 봄 여름 바다로부터 안개가 일어나 안개옷을 입은 것 같으므로 신선암이라 불렀다. 또 아무리 더운 때도 이 바위에 오르면 선선하며, 옛날에 신선이 내려와 해산할 때의 가위터가 있었다 한다. 신선암 주변에서 신석기시대의 융기문토기와 무문토기, 삼국시대의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아홉마지기재
신암리 새말 서쪽에서 화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 부근에 아홉마지기 되는 논이 있었다.
중리(中里):운곡:운암
신암리의 송리와 새말 중간에 있는 마을이므로 중리라 한다. 옛날에는 운곡(云谷· 雲谷)이라 불렀으며 운암(雲岩)이라고도 하였다. 인근의 바닷가와 산에 바위가 구름처럼 많아서 운암이라 불렀다.
즐문토기유적(櫛文土器遺蹟):빗살무늬토기유적
서생면사무소의 서편 도로 가 언덕에서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일제 때 이 곳에서 즐문토기가 출토된 이래 1966년에 서울대학교 발굴단이 발굴, 조사하였다. 1974년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다시 발굴하여 부산시 동삼동의 것과 같은 융기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융기문토기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4천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울산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인의 주거지이다.
탕건바우
신암리의 새말 북쪽 산길 옆에 있었던 바위이다. 바위가 탕건처럼 생겼는데, 길을 내면서 깨뜨려졌다.
효암강(孝岩江)
서생역의 남쪽을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강을 효암강이라 부른다. 효암강 어귀에 남북으로 자리잡은 마을을 19세기 말에는 효열리(孝烈里)라 부르다가,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고 난 뒤부터는 북쪽은 신암리로 들어가고, 남쪽을 효암이라 하였다. 서생면사무소가 있는 신암의 남쪽에 있는 이 아담한 마을을 효열이라 부르게 된 데는 사무치는 사연이 있다.
바닷가 마을이라 이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고기잡이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이 마을에 한 남편이 있어 바람에 배를 맡겨 동해 멀리 나가서 낚시질을 하다가 석양 무렵이면 돛대에 바람을 싣고 돌아오고, 부인은 이 바위 저 바위를 돌아 다니면서 해초를 뜯으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한 큰 불행이 닥쳐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배를 띄워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질 않았다. 아내는 하루 이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배가 뒤집혀 동해의 수중고혼이 된 것이었다. 하루는 깨어진 뱃조각이 뭍으로 밀려온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고 알리자 부인이 달려가서 그 뱃조각을 부등켜안고 통곡하며 몸부림치다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에 부인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부인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dq내 남편의 몸은 필경 물고기 밥이 되었으리라, 내 남편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빨아먹었던 생선을 내 어찌 입엔들 댈 수 있으랴%dq 그 후로부터 부인과 자식들은 생선은 물론 바다에서 나는 것은 일체 먹지 않았다. 이 가정의 곧은 마음을 온 마을이 알게 되고, 뒤에는 고을 원님이 알게 되었다. 그 후 그 절개를 우러러보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효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리(龍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용리‘는 옛날 용이 살다가 용연에서 멱을 감고, 용골산(龍骨山)에서 죽어 그 뼈를 묻었기 때문에 불리운 이름이라 한다. 1894년(고종 31)에는 용동(用洞)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용연(龍淵)을 명산리에 넘기고 나머지를 용리(龍里)라 하였다. 그런데 고종 때의 울주군 일원 지명에는 용(用)과 용(龍)이 혼용되고 있어서 용(用)이 용(龍)의 대자(代字)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마을도 용리 하나로 되어있다. 1962년에는 동래군, 1963년에는 양산군, 1983년에는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대비만딩이
용리 북쪽에 있는 산이다. 높이 209m이다. 이름의 유래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떠덕바우
용골산에 있는 바위이다. 산중턱에 바위가 떠덕떠덕 박혀 있으므로 떠덕바우라 부른다.
서당만딩이
용리 탠탄민딩이 앞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
용골산(龍骨山):용곡산(龍谷山)
용리의 용동 북서쪽에 있는 높이 209m의 산이다. 용골에 있으으로 용골산이라 부른다. ‘골(骨)‘은 ‘골(谷)‘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옛 고구려의 지명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울산에서도 유곡동(裕谷洞)을 유골(有骨)·유골(裕骨)이라 하였다.
탠탄먼딩이
용리의 용동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탠탄‘이라는 이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위양리(渭陽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후동(後洞)·위동(委洞)·양암(陽岩)의 세 마을이었고, 1894년(고종 31)에는 위동(渭洞)과 양암 두 마을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위동과 양암을 합하고 두 이름의 머리글자를 취하여 위양리라 하였다. 양암(陽岩)·막곡(幕谷)·위곡(渭谷) 세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갈매
위양리 양남 동남쪽 골짜기이다. 이 곳 지형이 풍수지리상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한다.
개천암골
위양리의 돼지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천암‘의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구터, 구터논
위양리의 윗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와 논이다. 옛날에 집터가 있었으므로 ‘구터‘라 한다.
굴땡갓
위양리의 막골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이 굴속처럼 깊숙하고 길다.
동녘저수지
위양리의 양암 북쪽에 있는 저수지로 1943년에 준공하였다.
딱밭골새
위양리의 윗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닥나무가 많았다.
막곡(幕谷)
위양리의 행정마을이다. 정조 때는 후동리(後洞里)라 하였다. 양암(陽巖)의 북편에 있는 마을로 그 지형이 장막 같다 하여 막곡이라 불렀다.
‘막‘은 ‘마지막·종(終)‘을 뜻하는 것으로, 끝골 또는 종곡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조 때의 이름이지만 뒷골(後洞)을 보아도 뜻이 역시 그러하다.
모구남뻔디기
위양리의 술맷골 동쪽에 있는 버덩이다. 모구나무(모과나무)가 있었다.
베락방우
위양리의 양암 동북쪽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가 벼락을 맞아서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북방우, 북방웃골
위양리 감나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와 바위이다. 바위가 북처럼 생겨서 북방우라 한다.
양암(陽岩):뱃바위
위양리의 행정마을이다. 마을의 서편에 바위가 있어 동녘에서 해가 뜰 때는 맨 먼저 빛을 받는 볕바위였다. 인근 마을과는 달리 이 마을에서는 유일한 바위였으므로 그 바위의 이름을 따서 정조 때와 1894년(고종 31) 양암이라 불러왔다. 그러다가 1914년 어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양암(良岩)으로 고쳤다. 지금은 예전대로 양암(陽岩)이라 한다. 바위가 있던 자리는 과수원으로 변하고 바위는 없어졌다.
마을 부근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및 삼국시대 고분군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와그덤:와우산(臥牛山)
위양리 막골 동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소가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한다.
용바우, 용바우논
위양리 새앳들 밑 냇가에 있었던 바위와 논이다. 바위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깨어져 없어졌다.
위곡(渭谷)
위양리의 행정마을로 막곡의 북편에 있다. 이 마을에서 흘러 효암강으로 들어가는 내를 위천(渭川)이라 하므로 마을 이름도 위곡이라 부르게 됐다. 정조 때의 이름이 위동(渭洞)이었음을 볼 때 위곡은 위골에서 유래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위‘는 단지 방위를 뜻하는 ‘위(上)‘의 음차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위수(渭水)는 황하의 지류로서 섬서성에 있는 강이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이 곳에서 낚시질 하다가 주(周) 문왕(文王)의 부름을 받고 재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옛 지명에서도 이 글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위곡 저수지
위양리의 위곡 위에 있는 저수지로 1943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춘당의 논
위양리 중대 논 위쪽에 있는 논으로 춘당이라는 사람의 논이었다.
한오갓
위양리의 고래 및 동쪽에 있는 산이다. 한오라는 사람의 묘가 있다 한다.

진하리(鎭下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와 1894년(고종 31)의 기록 이래 일관하여 진하(鎭下)라 해 온 마을이다. 진하는 서생포 동첨절제사가 머무는 진(鎭)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1962년 동래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에는 양산군에, 1983년에는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진하마을이 하나의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아랫동네, 웃동네로 나누어 부른다.
구진들:구진포평(舊鎭浦坪)
진하리에 있는 들이다. 옛날 수군첨사진영이 있었던 들이라는 뜻이다.
나릿가
진하리 서북쪽에 있는 나루터이다. 온산면 강양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대바우:대암(臺岩)
진하리의 진하와 솔개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몇 개의 바위가 첩촉(疊矗)하여 큰 대(臺)를 이루고 있어 대암이라 한다.
명선도(名仙島:鳴蟬島):동백도
진하리에 있는 섬으로서 본래 명선도(鳴蟬島)라 하던 섬이다. ‘선(蟬)‘의 훈(訓)은 매미로서 불모(不毛)의 섬을 ‘맨 섬‘이라 하던데서 유래됐다. 맨 섬의 ‘맨‘이 ‘매미‘로 변하였고, 이를 훈차한 것이 명선도이다. 명선도(名仙島)는 후대에 아화(雅化)한 이름으로 보인다. 또 동백이 자생한다 하여 동백도라고도 불렀다. 둘레 330m, 면적 6,800㎡이다.
솔개:송포(松浦)
진하리의 ‘솔개‘는 마을 이름이자 개(포구)이름이다. 진하 남쪽에 있는 개로서 옛날에 솔이 무성하여 솔개·송포라 하였다.
이덕도(二德島)
진하리의 섬이다. 명선도의 남쪽에 있는 바다 가운데 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신라의 경순왕이 승하하면서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오를 때 근처에 있는 섬들이 모두 깨어졌는데, 이 바위도 그 피해를 입어 두 개의 바위로 남게 되었다. 덕도(德島)라고도 하며 남쪽을 만이덕, 북쪽을 샌이덕이라 부른다. ‘만‘은 ‘마‘로서 남쪽을, ‘샌‘은 ‘새‘로서 동쪽을 뜻한다.
자선비(慈善碑)
진하리에 있는 비석이다. 이규현과 그의 아들 이종수의 은혜를 기념하여 마을에서 세웠다.
진하리 고인돌
진하리 산7-3에 있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돌이다. 국도 옆 야산의 진하해수욕장 남쪽에 있다. 5.4m×4.7m×(-2.3) 크기의 방형석과 하부 돌 등이 흩어져 있다. 지석묘 여부는 시굴조사를 해 보아야 판명될 것이다.
진하 해수욕장
진하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울산시내 인근의 해수욕장이 오염 등으로 인하여 꺼리는 반면 울산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이 곳은 해수욕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통시돌
진하리에서 온산읍 강양리의 강구와 마주 보는 하구의 작은 수중암이다. ‘통시‘는 뒷간(변소)을 뜻하는 말이다.

화산리(禾山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 민등(禿登)과 마근(麻斤)의 두 마을이 있었는데, 1894년(고종 31) 상독(上禿)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화산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2년 동래군에, 1963년 양산군에, 1983년 울주군에 편입되었다.
화산이라 하는 말은 화정리의 술마와 마찬가지로 ‘술뫼‘로 볼 수 있다. 높은 산을 ‘수리‘라 하며 이것이 줄어서 ‘술‘이 되기도 한다. 수리 또는 술의 차자(借字)로는 述·蘇·所·近·守·戌·鷲·酒·首·炭·禾 등이 있다. ‘禾‘의 고음(古音)은 ‘愁‘와 같이 ‘수‘로 읽어 신라나 고려에 이르기까지 ‘화주(禾主)·화척(禾尺)‘ 등을 모두 ‘수‘로 읽었다. 울산지방에서도 ‘禾‘를 ‘수‘의 차자로 쓴 곳이 있다. 따라서 수리의 차자로 된 ‘禾山‘도 이것을 음독 (音讀)하여 지금은 화산이라 하나 그 본 뜻을 거슬러 올라 가면 ‘수리뫼‘로서 높은 산 또는 산아래 마을로 볼 수 있다.
화피리(禾皮里) 숲마을 (상북면)
화마(禾麻) 술마 (화정리)
화산리는 온곡1리·온곡2리·화산·마근 네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마근(麻斤)
화산의 북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옛날 이 곳에 삼(麻)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마근(麻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생각컨대, 산의 뜻 뫼가 買·馬·麻·彌 등으로 차자 되므로 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도 볼 수 있으나, 막곡의 ‘막‘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막‘의 연장음 ‘마그‘ 에 ‘당‘을 붙이면 ‘마근당‘으로 발음되는데, 막곡의 ‘막‘은 ‘終‘의 뜻을 가진 것이니 마근당(麻斤堂)도 역시 ‘終谷‘이 된다.
‘堂‘은 골(谷)의 뜻을 가졌다. ‘谷‘의 고훈(古訓)은 ‘실‘이기도 하지만 ‘ ‘이기도 하며, 이 ‘ ‘이 ‘堂‘이 되기도 하고, 呑·屯·頓·丹·旦 등으로 변하였다. 골(谷)의 뜻으로 ‘堂‘이 붙은 지명은 울산지방에도 적지 않다.
두왕당(豆王堂) (울산시 두왕동)
지당(池堂) (울산시 송정동)
소부당(巢父堂) (울산읍지, 산천조)
마근굴, 마근재
화산리의 마근 동쪽에 있는 굴이다. 기차굴이 마근굴이며, 온양읍 발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마근재이다. 마근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말배미
화산리의 앞에 있는 논으로 지형이 말(斗)처럼 생겼다.
무다앗보
화산리 민등 서북쪽에 있는 보로 옛날에 무당이 만들었다.
무랭잇골:무룡곡(舞龍谷)
화산리 마근당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룡의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무학동(舞鶴洞)
화산리 은곡에 있는 소지명이다. 비학(飛鶴)에서 학이 날아와 이 곳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무학동이라 부른다.
민등(岷 ):민등시장:아침제자:화산시장
화산리에 있는 장터이다. 아침에만 섰으며, 민등시장·화산시장이라고도 한다. 산에 나무가 없이 민둥하므로 민등장이라고 하였다. 5일과 10일에 장이 섰다.
서생역(西生驛)
화산 동남쪽에 있는 기차역이다. 1957년 11월 동해 남부선의 간이역으로 설치되었다.
수난골
화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못이 있었는데 터져서 화산마을을 휩쓸어 간 일이 있어 ‘수난골‘이라 한다.
시밤
화산리 추넘보 위에 있는 들이다. 시비기(물구덩)가 많은 곳이라.
온곡(溫谷), 온곡굴
화산리 동남쪽에 있는 행정마을로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내가 깊고 마을이 소쿠리처럼 생겨서 따뜻하므로 온곡이라 부른다. 온곡1리는 민등장이 있었던 시장통이며, 온곡2리는 서생역 서편 마을이다. 온곡굴은 동해남부선의 기찻굴이다.
온곡리 능선에서 청동기시대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역전(驛前)
화산리의 서생역 앞에 있는 마을이다. 간이역인 서생역의 앞이 된다.
적목골(笛牧谷)
화산리의 골짜기이다. 외떨어져 있는 적막한 골짜기라 붙여진 이름이다.
조개터
화산리 천마짓보 서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조개무덤이 발견되었다.
쪼매기 집터
화산리의 마근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쪼매기라는 사람의 집이 있었다 한다.
채봉골
화산리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채봉(假葬)을 했던 골짜기이다.
태봉산(胎峰山:台峰山)
화산리 온곡 서쪽에 있는 산이다. 옛날 이 곳에 왕자의 태를 묻었다 한다.

화정리(禾亭里)
서생면 10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화정리는 신라의 샛내(生西良·東安)이며,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다. 정조 때는 온양읍에 속한 수마리(禾麻里)였다가 1894년(고종 31)에는 구진동(舊鎭洞), 1911년에는 구정동(九亭洞),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는 수마동(禾麻洞)과 구정동을 합하여 화정리라 하였다. 곧 수=화(禾)+정(亭)동이 된 것이다. 즉 술마를 수마(禾麻)라 한 화(禾)와 구정의 정(亭)을 따서 절충식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화정(禾亭)과 술마(術麻) 두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화정리는 본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이 있던 곳이다. 신라 초의 생서량을 757년(경덕왕 16)에 동안군(東安郡)으로 고쳤으며, 이를 서사포(西舍浦)라 하였다. 조선 초에 서생포(西生浦)라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 후에 서생포 왜성 안으로 수군 첨사진(僉使鎭)을 옮겨감으로써 현 서생리를 서생(西生)이라 부르게 됐다.
‘生西良‘은 ‘샛내‘이니 이는 ‘새붉은 나라(曉良·曙良)‘이다. ‘生‘은 그 음을 반절(半切)하여 ‘새‘이며, ‘西‘의 고음(古音)은 ‘셰‘이니 ‘生西‘는 ‘새(曙·曉)‘의 중첩이다.
이 ‘새‘는 옛 나라 이름이나 지명에 新·斯·徐·始·鷄·東·金 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生西‘가 ‘새(曉·曙)‘임은 경덕왕이 개명하였을 때 역시 새내(東安)라 한 것으로 보아도 증명이 된다. 량(良)의 고음(古音)은 ‘라‘로 이는 노(盧)·라(羅)·야(耶)·나(那)·랑(浪)·노(奴)·양(壤)·낙(洛) 등과 같이 ‘나라(邦)‘를 의미하는 것이니 샛내(生西良)는 곧 동방의 들 나라라는 뜻을 가졌던 곳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서사포(西舍浦)라는 지명의 유래도 ‘서(西)‘는 위에서 본대로 새(曉)의 뜻을 가진 ‘셰‘이며, ‘사(舍)‘는 마을의 옛말 ‘ ‘로서 집회소와 접사(接舍)를 뜻하므로 관청이나 관아(官衙)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사는 ‘새관청·새접사·새집회소‘가 되며, ‘샛내‘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 할 것이다.
서생포(西生浦)라는 지명은 조선 초의 기록에 이미 나타난다. 태종 7년(1407) 7월의 기록에 의하면, 경상도 병마절제사 강사덕의 보고서에 서생포만호라는 말이 나타난다.
서생포라 하는 지명의 뜻을 살펴본다면, ‘서(西)‘는 ‘셰‘로서 역시 새(曉)를 나타내는 것이며, ‘생(生)‘은 ‘새‘로 동방을 의미하여 동안군(東安郡)과 같은 말이 된다. ‘포(浦)‘는 ‘개‘이다. 그러므로 서생포도 ‘새개‘ 또는 ‘해뜨는 땅‘으로 볼 수 있다.
이 ‘샛내‘라는 부족국가로부터 시작하여 샛내군(生西良郡)·샛내군(東安郡)·세 개(西舍浦)·새개(西生浦)로 이어 온 나라 또는 고을의 치소(治所)는 화정리의 상구진(上舊鎭)이니 지금의 술마(術麻)지방이다. 온양읍의 서포(西浦), 온산읍의 서호(西湖-강양)라는 지명도 다 이와 관련된 이름이다.
고디이 창자
화정리 큰골 서쪽에 있는 꾸불꾸불한 길이다. 길이 작은 소라(고동)의 창자처럼 생겼다.
고무솔박
화정리 잿먼당 북쪽에 있는 버덩이다. 고무솔(곰솔:해송)이 많았다.
구들뺑
화정리 술마못 북쪽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서 구들장이 났다.
구정(九亭:舊亭):구진(舊鎭)
화정리의 중심되는 마을이다. 서생포의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여기에 있다가 임진왜란 후에 서생포 왜성 안으로 진을 옮기게 되자 구진(舊鎭)이라 하였다. 1910년경에 구정(九亭)으로 고쳤다. 이는 아홉 개의 정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구진‘이 변한 음차(音借)에 불과한 것이다. 마을의 북편 산에 만호진의 성터가 일부 남아 있다.
꿀다리
화정리에서 강양으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있었다 한다. 돌을 모아서 놓은 통시다리였는데, 지금은 남은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서식하므로 꿀다리라 한다. 꿀은 굴의 방언이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다.
화정리 앞을 흐르는 회야강의 하류를 일승강(一勝江)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이 강의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이겼다 한다.
제 1차 도산성 싸움 때의 일이다. 조·명 연합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성이 워낙 험한데다 적들은 조총과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댔고, 날씨는 얼어붙어 동상자가 속출하였다. 군사들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적군의 응원병은 수륙양면으로 밀려오니 자칫하다가는 적에게 포위될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명연합군은 천추의 한을 품고 경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로 물러선 연합군은 다시 적을 칠 계책을 세웠다. 당시 서생포의 왜성은 거의 빈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쓸만한 군사들이 모두 울산의 도산성에 구원병으로 출동하고 없기 때문이었다. 이 때야말로 허를 찔러 서생포 왜성을 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해 줄 때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과 조승훈(祖承訓)은 결사대 20인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물론 지리에 밝은 울산의 군사 몇 사람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들 결사대는 야밤에 서생포로 잠입하여 회야강에 있는 조교에서 적을 만났다. 이 때 명장 이춘방(李春芳)이 급히 다리를 끊어 왜병을 수장하는 동시에 건너온 적군의 목 백여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경주 본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승전이 있은 뒤로부터 화정리 일대의 회야강을 일승강(一勝江)이라고 불렀다. 또 여기에 놓여 있었던 다리는 통시다리라 하여 돌을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 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아 사람들이 건넜다. 이 다리에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전쟁에서 이기며, 그 뒤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낭시낭 비알
화정리 예수더매 남쪽에 있는 산이다. 산이 낭떠러지로 되어있다 한다.
도둑골
화정리 곡무디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도둑이 살았다.
마성(馬城):만리성(萬里城), 만리성터, 만리성골
화정리 술마 남쪽에 있는 성터로서 옛날에 군마를 먹이기 위하여 20여 정보에 쌓은 성이다. 위양리의 위동 뒷산에서 술마에 이르는 성이다. 만리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쌓은 목장을 둘러싼 마성(馬城)이라 전해온다. 숙마성(熟馬城)이나 마성은 다 출입금지 구역에 걸쳐 있어 자세한 조사가 불가능하다. {울산읍지}는 이 두 성을 동명이칭으로 보아 같은 성이라 하였다.
면산(面山)
화정리 재탯골과 술마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서생면사무소의 소유였다.
부엉드미
화정리 마근창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부엉이가 많았다.
불썬방우
화정리 장마논골 동쪽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 부녀자들이 불을 켜놓고 소원성취를 빌었던 바위라 한다.
빈대골:빈대절골
화정리의 구정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폐사 되었다.
성또가리
화정리 술마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만리성터가 있으므로 성또가리라 한다.
성인사곡(聖人寺谷):센삿골
화정리 재굼터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성인사라는 절이 있었다.
숙마성(熟馬城):술마(術麻):수마(禾麻):화마
술마는 화정리의 구정 서북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마을 뒤에 숙마성이 있다. ‘술(術)‘은 수리를 뜻하는데, 소(蘇)·근(近)·술(戌)·취(鷲)와 같이 고산(高山)을 말한다. ‘마(馬, 麻)‘도 역시 산악을 이르는 것이므로 높은 산 또는 솟은 산을 의미하게 된다. 술마는 본래 온남면에 속하던 마을이다. 1914년 이 후의 기록에는 서생면으로 되어있다. 이 때는 수마(禾麻)라 하였는데, 화(禾)는 수로도 읽으니 술의 음차(音借)이다.
숙마성은 신라 때의 숙마진성이다. 여기서 숙(熟)도 술(術)의 음차(音借)이다. 숙마성은 신라 때의 화정리의 술마마을에 숙마진을 두어 나라를 지켜왔다 하며, 그 곳에 거대한 산성지를 지금도 남겨놓고 있다. 술마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경사진 구릉이나 산 위에 걸친 성으로서 석축이 많이 남아있다.
술마는 또 수마(禾麻)라 하였는데 수(禾)는 ‘술마‘의 ‘술‘에 대한 차자(借字)로서 화정의 화(禾)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화‘가 ‘수‘로 차자된 예는 상북면 궁근정리의 수피를 화피(禾皮)로 서사(書寫)한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수이리(愁 里)‘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 곳이 지금의 술마이다.
고려 때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조선에 와서는 {태종실록} 태종 7년(1407) 7월의 기사에 당시에 화정리에 서생포 수군만호영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실성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익년에 이를 완성하였다. 지금도 그 성지는 대부분 남아있다. 왜군이 물러나자 수군의 진(鎭)을 왜성 안으로 옮기면서 수군의 동지첨절제사가 이를 지키도록 하여 그 진영이 조선말까지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서생면 지역은 삼국시대 이 후 줄곧 방위기지의 역할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일이다. 어떤 도참가가 하루는 지팡이를 짚으며 서생에 이르렀다. 며칠을 두고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 시루성산에 올랐다. 사방의 형국을 두루 살피더니 이 곳이야 말로 ‘군수대좌형국(軍帥大坐形局)‘이로구나 하고 산을 내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서생지역이 도참가의 예언처럼 큰 장수가 앉을 자리였다. 주위에는 이 형국과 대응되는 지명들이 많이 생겨났다. 신암리의 군경포(軍警浦)를 비롯하여 나졸을 뜻하는 나사(羅士), 용리(龍里)의 홍문가(紅門街), 명산리의 용연(龍淵), 뒷산의 기암(旗岩), 장안면 효암의 낙음(樂音), 서생리 뒷산에 우뚝 선 탄금암(彈琴岩), 서생리 인성암(引聖庵), 앞산의 장군암(將軍岩) 등이 그것이다.
약뭇골:약밋골
화정리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피부병에 좋은 약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염밭걸
화정리의 구진(舊鎭) 앞에서 일승강(一勝江)에 이르는 일대의 들이다. 염밭은 염전(鹽田), 걸은 작은 내(小川)를 뜻하는데, 가뭄이 오면 논에 염분이 나타나 부르게 된 이름이다.
이양지밋골
화정리 예수더매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지고을 원님을 지낸 이씨의 묘가 있다 한다.
재굼터:재궁터
화정리 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재궁이 있었다 한다.
재탯골:절탯골
화정리 절골짝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잿골
화정리의 술마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온양읍 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
점골짝:점골(店谷)
화정리 잿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토기점이 있었다.
좌도도만호터(左道都萬戶-)터
화정리에 있었던 옛터이다. 세종 때 화정에 수군 좌도도만호영이 있었는데, 예종 때 만호영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