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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양 읍(彦陽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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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작성일 2004-03-27
언 양 읍(彦陽邑)


읍의 위치와 자연
언양읍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서쪽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울주군 범서읍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상북면과, 남쪽은 삼남면·삼동면과 접하고, 북쪽은 두동면·두서면과 경계하고 있다.
읍의 서쪽을 남북으로 비스듬히 경부고속도로와 국도 35호선이 지나며, 읍의 동북지역(태화강 상류)은 사연제에 의하여 여러 마을이 수몰되었다. 고헌산(1.032m) 연화산(530m)의 능선지맥들이 남쪽 방향으로 뻗어내려 200∼300m의 저산성지가 되었다. 태화강 상류에는 사행성 곡저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읍 이름의 유래
언양이라 하면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광의의 언양은 옛 언양군의 영역, 협의의 언양은 현재의 언양읍이나 언양 일대를 말한다.
여기의 언양군은 지금의 언양읍·상북면·삼남면 등의 전역을 말한다. 언양에 관한 최초의 지명은 ‘이이벌‘이다. 후일의 삼한 부족국가 시대부터 지명 끝에 ‘불 화(火)‘자를 붙여 부족국가를 표시함에 따라 벌(벌판)이 불(火)로 바뀐 것으로 본다. 언양이라는 이름은 고헌산(高 山)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문표기 지명에 있어서 ‘양(陽)‘은 산의 남쪽(예, 한양=한산의 남쪽), 또는 강의 북쪽(한양=한강의 북쪽)을 뜻한다.
언양의 옛 이름 ‘헌양( 陽)‘은 고헌산 남쪽을 뜻한다. 고헌산은 본래 언양고을의 진산(鎭山)으로서 그 뜻은 큰산을 나타낸다(고헌산 해설 참조). 고헌산이 우리말 큰산을 표기하기 위한 음차(音借)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또 한자문화 정착 이 후에 생겨난 ‘헌양‘·‘언양‘의 변천에 있어서 헌=언의 변천은 단순한 한문 음차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읍의 연혁
언양읍은 울주군 12개 읍·면의 하나이다. 757년(경덕왕 16)에 길천리(吉川里) 지화(知火)에 치소(治所)를 두었던 거지화현(居知火縣)의 이름을 헌양현( 陽縣)이라 개명하면서 고헌산(高 山)의 남쪽인 지금의 언양으로 현의 치소(옛 치소는 동부리)도 옮겨 왔다.
언양현은 본래 상북(上北)과 중북(中北) 두 면으로 갈라져 있었다. 1899년(광무 3)의 {언양읍지(彦陽邑誌)}에 따라 이 때의 두 면이 관할하던 구역을 보면, 상북면이 읍내(邑內)·송북(松北)·어음(於音)·반송(盤松)·천소(泉所)·부제(釜堤)의 8개 동을, 중북면이 대곡(大谷)·고하(庫下)·다개(茶開)·직동(直洞)의 4개 동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북면의 반곡(盤谷)·천전(川前)·다개(茶開)·태동(台洞)·기지(耭池)·직동(直洞)·남동(南洞)의 7개 리, 중남면의 평리 일부, 울산(울주)군 두동면의 대곡동(大谷洞), 천전동(川前洞) 일부, 두서면의 구영동(九英洞), 차동(次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언양면이라 하고 울산(울주)군에 편입하였다. 이 언양면은 동부·서부·어음·남부·송대·반송·반천·반연·반곡·대곡·다개·평리·태기·직동 14개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 7월 1일 삼남면의 구수리를 편입하여 15개 법정동리, 32개 행정마을, 50개 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구수리(九秀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언양군 삼동면 구수동(九藪洞)이었다가, 고종 때는 하남면에 속하였다. 1911년에 다시 구수동으로 고쳐 삼동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작동(鵲洞) 일부를 흡수하여 구수리(九秀里)라 하였다. 1932년 10월 31일과 1933년 1월 1일에 삼동(三同)·중남(中南)의 두 면을 삼남면(三南面)으로 합하게 되면서 여기에 속하였고, 1973년 7월 1일 교통의 편익을 고려하여 언양면(彦陽面)으로 이속하게 되었다.
구수리는 구수·대동(大洞)·무동(武洞) 세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구수리‘는 늪과 숲이 많으므로 구늪 또는 구늪숲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남쪽의 밤나무단지(산 270번지 임야)일대에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대암호 북쪽 구릉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구늪:구늪숲:구수(九秀:九藪):구수삼(九藪森)
구수리의 행정마을이다. 구늪이라고도 한다. 아홉 늪에서 빛이 난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거나, 늪이 아홉이란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고종 때 이름이 구수인 것을 본다면, ‘수(藪)‘는 숲이며 ‘구(九)‘는 많다는 뜻을 표현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곧 구수는 남천 쪽으로 아홉 곳의 돌출한 숲이 있는데서 유래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 구수를 1911년에 아화(雅化)하여 고친 이름이 지금의 구수이다.
또 구늪숲은 구소림(九沼林)이니, {언양읍지}의 임수(林藪)편에 나타나는 구수수(九秀藪)이다. 구는 아홉보다는 추상적으로 많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이는 늪(沼)이 많은 숲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구수삼‘도 같은 뜻이다.
행정마을로서의 구수는 구수리의 맨 서편에 있으며 장촌의 남쪽에 있다.
구수연(九藪淵)
구수리에 있던 못으로서 옛날의 이무기 이야기가 전해온다. 숙종 때의 일이다. 구수리 물막현(勿幕峴) 가에 한 암굴이 못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굴에는 한 마리 큰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용이 되려다 못된 이무기는 굴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근처로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란은 급기야 관아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현감이 직접 이무기를 퇴치하기 위해 나섰다.
1715년(숙종 41) 언양현감으로 있던 모일성(牟一成)은 포군(砲軍)을 거느리고 구수연에 다달아 군졸로 하여금 사격을 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린 군졸들은 감히 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를 본 현감은 본시 힘이 세고 담력도 뛰어난 무인이어서 감연히 총을 쏘며 굴 안으로 들어가 이무기를 쏘아 죽여 민폐를 덜었다. 그 때 죽은 이무기를 끌어내 보니 꼬리가 구늪숲에서 구수연까지 드리워질 만큼 길었다 한다.
남천(南川):대동앞걸
구수리 대동 앞을 흐르는 내이다. 언양의 남쪽이 되므로 남천이라 한다. ‘걸‘(고랑, 거랑)은 시내를 뜻한다.
노적봉(露積峰)
구수리의 원반송(原盤松) 앞에 있는 산을 노적봉이라 한다. 층암(層岩)이 깎은 듯이 태화강에 절박하여 있는 산인데, 마치 노적가리 같다 하여 노적봉이라 부른다.
대동(大洞):대바우:대암(大岩)
구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큰 마을이므로 대동이라 하고, 마을에 큰 바위가 있으므로 대암·대바우라고 한다.
대암제(大岩堤)
1969년 12월 31일에 준공한 공업용수용 땜이다. 구수·하잠·둔기의 3개 리에 걸쳐 있으며, 골둔기 마을이 수몰되어 철거하였다. 총 저수량 9,000,000㎥, 면적 70㎢, 둑 길이 320m, 둑 높이 24.5m이다.
무동(武洞:舞洞)
구수리의 마을이다. 춤추는 듯한 산세를 따라서 무동(舞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뒤에 와서 무동(武洞)으로 고쳤다.
물막현(勿幕峴)
구수리에 있는 고개이다. 임진왜란 때 언양현의 여러 의병들이 이 자리에서 결진하려고 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dq물막(勿幕-진막을 치지 말라)%dq이라는 소리가 나 물막현이라 부른다.
비느티
구수리에 있는 골짜기이다. 대암제에서 언양과 삼남의 면계를 따라 서북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티‘는 고원을 뜻하는 말로 보며, ‘비느티‘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충곡(忠谷):충골
구수리의 자연마을이다. 옛날 충신이 피신한 곳이라는 설이 전해오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행정마을인 대동에 속한다.

남부리(南部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고종 때 언양군 상북면(上北面)에는 7개리가 속해 있었다. 동부(東部)·북부(北部)·송북(松北)·어음(於音)·반송(盤松)·천소(泉所)·부제(釜堤)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동부와 북부를 읍내라 하였다. 남부는 현청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남부동이라 하다가, 1914년에 남부리가 되어 언양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 곳 남부리를 포함한 동부리 서부리 일대는 언양 불고기단지로 지정되어 식도락을 겸한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행정상 남부1리·남부2리 두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나무전걸
남부리 160번지 주변의 도로를 나무전걸이라 한다. 옛날 이 곳에서 연료용 나무를 매매했다.
남천(南川):남천내:인당걸
남부리의 태화강 상류의 내이다. 상북면 석남사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부를 지나 태화강으로 흐른다. 태화강은 흐르는 지역이나 곳에 따라 언양에서는 남천, 범서읍에서는 굴화천(屈火川)이라 부른다.
배끄구시장태:바깥장터
남부리의 옛 장터이다. 언양현 때 7·17·27일은 성내에서 장이 열리고, 2·12·22일은 성 밖에서 열렸다. 남부리 340∼4번지 일대를 바깥장터라 하는데, 이는 2·12·22일에 열렸던 성 밖의 장터이기 때문이다.
안장터:언양장터:읍장터
남부리 273-2번지 일대를 안장터라 한다. 언양현 때 7·17·27일의 장은 성내에서 열었다. 그 뒤 언양군이 울산군에 합치면서 이 곳에서 개장하였는데, 성내에서 개장한다 하여 안장(內場)이라 하였다. 1954년 안과 바깥시장을 합치면서 안장은 폐지되고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75년 언양천주교회에서 상설시장을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대조산(將臺造山)
남부리 조산배기의 앞에 있는 들을 장대조산이라 부른다. 옛날 장수의 지휘소로 보고 있으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조산이란 천연의 산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산을 말한다.
조산(造山)배기
남부리에 있는 마을이다. ‘조산‘은 만들어 세운 작은 동산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알 수 없다. 장대조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개리(茶開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이래로 줄곧 다개라 불려오고 있다. 언양현 때 중북면(中北面)에 속했고, 언양군 때인 1911년에도 역시 다개동으로 중북면에 속해 있었다. 1941년 행정구역 개편 때 평리(平里)를 나누고, 두서면 차동의 일부를 편입하여 역시 다개리라 하여 언양면에 속했다. 고헌산 여러 골짜기의 물이 흘러 내려 시내가 많으므로 다계(多溪)라고도 불렀다 한다. 다개 하나의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갈밭:갈전(葛田), 갈밭고개
다개리의 새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갈대와 칡이 많았다. 서북쪽에서 구량리(두서면)로 넘어가는 고개도 갈밭고개이다. 옛날에 염씨(廉氏)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며 중북면사무소 터가 있다.
고래샘:고라천(古羅泉):경천동(鯨泉洞)
다개리 새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래샘‘이라는 샘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고래섬이라고도 부른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고래‘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굴바우(屈巖)
다개리의 고헌산(高 山) 용새미에서 조금 내려오는 곳에 있다. 안이 넓고 샘도 있어 난리때는 이 곳에서 난을 피했다 한다.
굼닥:상리(上里)
다개리의 한 마을이다. 굼닥은 상리라고도 하는 마을이며 굼대개의 준말이다. ‘굼‘은 ‘구미‘라고도 하며, 굼깊은 지형을 형용하는 말이다. 구미로 나타나는 곳은 두동면 구미가 있고, ‘굼‘으로 나타나는 마을은 두동면 월평리의 ‘굼말등‘이 있다. ‘절터구미‘라 하는 구미도 이 ‘굼‘의 연장음이다. 후미진 마을을 뜻한다.
다개(茶開):다계(多溪):다기(多基)
다개의 유래에 대하여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시내가 많으므로 다계라 하던 것이 다개로 변했다는 설, 땅이 넓고 터가 많아 다기라 하였다가 다개가 되었다는 설, 차나무밭을 개척하여 다개라 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산이 넓게 열린 마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의 뜻 ‘자(自)‘가 ‘차‘로 호전(互轉)하여 ‘次‘ 또는 ‘茶‘로 되었을 것이다.
다개고개:찻골고개
다개리와 두서면 차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차리 사람은 다개고개라 하고, 다개리 사람은 찻골고개라 한다.
다개리 고분군(古墳群)
다개리와 두서면 차리의 경계선의 한 고개에 있는 고분군이다. 이 고개를 다개 사람들은 찻곡(次谷)고개, 차리(次里) 사람들은 다개고개라 한다. 다개리의 공동묘지로부터 그 뒷편 일대 20여 개의 고분은 일제 때 대부분 도굴되었다. 큰 봉분이 남아있는데, 석곽분(石槨墳)으로 되어 있다.
담안
다개리 갈밭 서북쪽에 있는 밭으로 옛날 담을 친 큰 마을이 있었다.
두투방우
다개리 영구사 뒷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표면이 우둘투둘하다.
뒷골못
다개리에는 여러 곳에 못이 있다. 뒷골못을 비롯하여 연구못·새못·신경못·다개못 등이 그것이다.
매봉:매바우
다개리 고헌산의 한 봉우리이다. 멀리서 쳐다보면 마치 매처럼 생겼다 한다.
맹매기방우
다개리 굼딱 서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명매기(칼새)가 살았다.
미륵등
다개리 갈밭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에 미륵이 서 있었다 한다.

복치음수혈(伏雉飮水穴)
다개리에 있는 묘터로 꿩이 엎드려 물을 마시는 모양을 하고 있다. 지리풍수설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산성골(山城谷)
다개리 굼대개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는 옛 산성터가 남아 있다. 이 지방이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구라벌(仇良伐)이라 하던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성도(城都)로 생각되는 곳이다. 돌로 쌓은 옛 성터가 있다.
소새등
다개리의 주산등 서쪽에 있는 등성이이다. 지형이 소의 혀(소혀=소새)처럼 생겼다.
신리(新里):새마을
다개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마을 또는 신리라 한다.
안수바탱이
다개리의 미륵골 북쪽에 있는 버덩이다. 숲이 무성하므로 사람들이 이 곳에 앉아서 쉬었다 한다.
연구골
다개에서 서북으로 들어가 고헌산 아래 있는 골짜기이다. 연고사(連高寺)라는 절이 있어 연구골이라 한다. 연고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는 이름난 절이었으나 조선왕조 말에 폐사되었다. 연구골에는 연구못이 있다.
절터구미
다개리의 연고사가 있던 터이다. 굼 깊은 곳이라 하여 절터구미라 한다. 절이 있던 골짜기를 연구골이라 한다.
용샘(龍泉)
다개리의 고헌산 정상에 있는 샘이다. 가뭄이 들면 부정을 금기하며, 목욕재계하고 이 샘에서 한밤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비를 비는 제관의 정성이 부족하거나 부정한 것을 보면 산에서 범을 만나기도 했다 한다. 용에게 비를 비는 곳이며, 용이 잠기는 곳이라 하여 용새미라고도 한다.
죽도가리
다개리 다개등못 윗쪽에 있는 논이다. 어느 흉년에 죽 한 그릇과 바꾸었다 한다.

대곡리(大谷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대곡리는 경주 외남면(外南面)의 대곡리와, 언양현 중북면(中北面) 대곡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두북면(斗北面)의 대곡리를 언양면 대곡리에 이속(移屬)하여 비로소 한 개의 대곡리가 되었다. 이 때 반곡리 일부도 여기에 합하였다.
대곡(大谷)은 ‘한실‘이라 불러왔다. ‘大‘는 명사 위에 붙어 큼을 나타내는 ‘한‘이며, ‘谷‘의 훈(訓)은 ‘실‘이다. 그러므로 큰 골짜기=한실=대곡이 된다. 사연제(泗淵堤)가 축조되어 반구대의 북쪽을 제외하고는 마을이 수몰되어 이주하였다. 대곡이라는 한 개의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건너각단:신리(新里):건넌들
대곡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내 건너편에 있다. 새로 된 마을이므로 신리라 한다. 현재는 수몰되어 없어졌다.
공자배미
대곡리의 당산걸에 있는 논이다. ‘공자배미‘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향교와 관계된 전답이었을수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당산걸
대곡리의 청살비 위에 있는 소로 옛날에 당산제를 지냈다.
대곡천(大谷川)
대곡리를 흐르는 내이다. 태화강 상류이며 길이 23.4㎞이다.
드러바우
대곡리의 건너각단 위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들어 얹혀 있다.

딘등
대곡리 큰 마실 동남쪽 등성이로 지형이 가팔라서 오르내리기가 힘들다 한다. ‘딘‘은 ‘힘든‘의 방언이다.
마당바우(2)
대곡리의 서쪽과 서원마실 서쪽에 각각 ‘마당바우‘라고 부르는 두 개의 넓고 펀펀한 바위가 있다.
망성고개
대곡리 지통마실 북동쪽에서 범서읍 망성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메주쑤
대곡리 서쪽에 있었던 소로 모양이 메주처럼 생겼다.
모은정(慕隱亭)
대곡리 반구대 북쪽 언덕에 있는 정자이다. 이정혁(李廷赫)이 세웠고, 장석영(張錫英)의 기문이 있다. ‘모은(慕隱)‘은 포은(정몽주)선생을 기린다는 뜻이다.
반구서원(盤龜書院) 유허비
대곡리 서원마실에 있는 서원터의 비이다. 반구서원의 정확한 이름은 반고서원(槃皐書院)이다. 1712년(숙종 38) 언양 사림들이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선생이 언양의 요도(蓼島)에 귀양살이 할 때 이 곳 반구대를 즐겨 찾았고,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선생 또한 찾아왔던 곳이라 하여 서원을 세우고, 세분의 위패를 모셨다.
1728년(영조 4) 화재를 입어 이듬해에 다시 세웠으나, 1871년(고종 8)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1900년(광무 4) 언양 유생들이 이를 만세에 기념하기 위하여 반고서원유허비와 비각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반구대(盤龜臺)
대곡리 반구산의 동쪽 끝에 있는 명소이다. 정몽주의 호를 따서 ‘포은대‘라고도 한다. 두동면 천전으로부터 흘러오는 구곡(九曲) 시냇물이 반구대를 스쳐 사연제(泗淵堤)로 들어간다. 30m가 넘는 반구산의 벼랑은 3층을 이루는 기암이다. 층암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가 걸어나오는 것 같아 반구대라 불린다.
층암 밑에는 엎드린 거북 모양을 이룬 석산 등 그 경치가 장관을 이루어 제2의 금강산이라고도 한다. 정몽주가 언양 적거(謫居)시에 여기서 노닐었다 한다. 사연제의 거울같은 물이 반구대를 적시고 있으며, 대의 북쪽 언덕에는 삼현재(三賢齋)·집청정(集淸亭)·모은정(慕隱亭)이 있어 그림자를 사연제에 던져주고 있다. 여기에 반고서원이 있었다. 다음은 정몽주가 반구대에서 읊었다는 시이다.

나그네 마음이 오늘 너무 쓸쓸하여
바닷가 산에 올라 물 가에 앉았노라
지식 있어도 나랏일 오히려 그르쳤고
주머니 속에는 오래 살 약도 없네
세모(歲暮)의 용은 골짜기에 숨어 서글픈데
가을 학은 푸른 하늘에 날아 기쁘하네
손으로 국화 꺾어 다시 한 번 취하니
우리 임금 고운 모습이 구름넘어 떠오르네

언양 사림(士林)은 우리 고장을 찾은 정몽주를 기려 많은 시문을 남겼다. 다음은 반구대 암벽에 새겨진 고종조 언양 사림 천사(泉史) 송찬규(宋燦奎)의 포은대영모사(圃隱臺永慕辭)이다.

높은 반구대 깎은듯 서 있어
한 줄기 기상이 하늘에 뒤섞이네
백 장(丈)이나 솟아오른 굳센 저 바위들
천년토록 흐르는 맑은 저 시냇물
이 산 저 내에 일월은 끝이 없고
송백(松栢)도 절개지켜 구름속에 푸르르니
포은선생 충절(忠節)이 이 곳에 깃들었나
굽이도는 시냇가를 나 홀로 거니네

반구대 암각화(岩刻畵)
반구대에는 국보로 지정된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는 사연제의 물에 잠겨있었는데, 이상 가뭄으로 수면위로 잠깐 출현하였던 것을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 문명대(文明大) 교수 팀이 발견하였다. 사암(砂岩), 혈암(頁岩), 이암(泥岩)의 호층(互層)으로 형성된 퇴적암(堆積岩)의 매끈하고 반반한 암면에 원(圓), 와(渦), 능형( 形) 등 각종 도안과 호랑이, 거북, 고래, 사슴과 여러 사람이 탄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암각화는 높이 2m, 폭 8m의 암면에 그려졌다. 암면 전체에 큰 균열들이 있으나 수식(水蝕)이 없는 반반한 면이어서 음각된 선화(線畵)를 그대로 볼 수 있다. 60여 마리의 고래가 새겨져 있는데, 울산의 장생포 고래잡이와 관련하여 포경의 역사가 선사시대부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이 귀신고래의 주 어장이었음을 나타낸다.
최근 울주군에서는 이 곳 반구대 암각화와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를 연계하는 바위그림공원을 구상하고 있다. 1995년 6월 23일에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반구산(盤龜山)
대곡리 뒤에 있는 높이 265m의 산이다. 산의 정상이 평평하여 거북이 형상이다.
반구천(盤龜川)
대곡리를 흐르는 하천으로 태화강의 상류이다. 대곡천이라고도 한다. 두동면·두서면과 연화산·국수봉 등에서 흐르는 여러 물이 합류하여 사연제로 들어간다. 암각화로 유명한 반구대의 형상이 거북이가 걸어나오는 모양이므로 반구산이라 하고, 이를 따서 반구천이라 한다.
백닭골:백계동(白鷄洞)
대곡리 한실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풍수설에 묘를 설치하기에 좋은 명당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풍수가 땅을 깊이 파지 말고 묘를 설치하라 했는데, 이 말을 듣지 않고 너무 깊이 파서 물이 솟고 흰 닭이 나와 백닭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원사(百源祠)
대곡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조에 지평 벼슬을 지낸 김세장을 모시고 1년에 한차례 제사를 지낸다.
사곡(寺谷):절골
대곡리 사연제 동쪽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사연제(泗淵堤)
대곡리에 있는 큰 저수지이다. 울산공업단지 건설과 함께 공업용수 확보책으로 1965년 12월 31일에 준공되었다. 총저수량은 25,000,000㎥, 제방높이 46m, 제방 길이 300m이다.
이 저수지 축조로 말미암아 대곡(大谷)·태기(台機)·반연(盤淵)의 여러 마을들이 수몰되어 철거하게 되었다.
서당마실
대곡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 있었다.
서원마실
대곡리의 반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반고서원이 있었다.
소암골:수암골
대곡리 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름의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송천정(松川亭)
대곡리 반구대 북쪽에 있었던 정자로 이름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쇠부리터
대곡리에 있는 옛 터이다. 대곡천 가에 있으며 옛날에 대장간(쇠부리)이 있었다.
수경정(修敬亭)
대곡리 반구대 아래 있는 정자로 그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사서각(賜書閣)
대곡리 포은대 북쪽에 있는 장서각이다. 정조 때의 참판 이운춘(李運春)이 내사서책(內賜書冊) 5질 등을 수장하였다.
애기쑤
대곡리 구이쑤 윗쪽에 있던 소이다. ‘애기‘라는 이름의 내력을 확인할 수 없다.
지통(紙 )걸:지통마실
대곡리 서당마실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동남쪽에 지통이 있었으나 사연제에 수몰되었다. ‘지통‘이란 닥나무 껍질을 가공해서 한지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통이다. 종이를 뜰 때 나무통에 풀어서 담구어 떴으므로 지통이라 한다. 지통이 쓰인 마을 이름은 닥나무종이를 만들었던 마을을 뜻한다.
집청정(集淸亭)
대곡리의 반구대 아래 반석 위에 있는 정자이다.
포은대영모비(圃隱臺永慕碑)
포은대에 있는 비석이다. 1885년(고종 22)에 언양사람 송찬규(宋燦奎)와 권필운(權珌運)이 세웠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반구대에서 읊었다는 시와, 그 운자(韻字)를 따 지은 자신들의 시를 새겨 포은의 충절을 기렸다.

동부리(東部里):읍내:군내:성내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마을 이름을 동·서·남·북부로 부르는 것은 큰 공청(公廳)을 중심으로 하여 소재하는 방위를 따른 것이다. 옛날 언양군 상북면 지역으로서, 정조 때 북부리에 속하고 있다가 고종 때 동부리로 갈라졌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동부리에 노동동을 합하여 언양면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옛 언양현·언양군의 청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읍내·군내·성내·읍리·관리(官里)·관문(官門) 등으로 불렀다.
동부1·동부2·동부3·동부4리 네 개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객사태(客舍-)
동부리 동헌태 서쪽에 있는 터이다. 언양현 객사가 있었다.
군기고태(軍器庫-)
동부리 객사태 서쪽에 있는 터이다. 언양고을 군기고가 있었다.
남문태(南門-)
동부리 227번지에 있는 터이다. 언양읍성 남문이 있었다.
남밖:남문밖:남문외(南門外)
동부리에 있는 마을이다. 언양읍성의 남문밖이 되는 마을이다.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또는 영화루(映花樓)라 하였다.
노동(路東)
동부리에 있는 마을이다. 길의 동쪽마을이라는 뜻이다. 옛 울산읍에는 노상(路上)· 노하(路下) 등의 마을 이름도 있었다. 1911년 상북면에 속한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동부리에 합하게 되었다.
대밭걸
동부리 134번지 일대에 대밭이 있었으므로 대밭걸이라 하였다. 1914년 언양군이 울산군에 병합될 때 서부리 30번지에 있던 군수 관사로 쓰고 있던 면사무소를 1933년 이 대밭 일부에 새로 세웠다. 대밭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1975년 죽림개화병으로 대가 모두 시들어 대지(垈地)가 되었다.
언양에는 옛날에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울창하였다. 다음은 조선 세종조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여방(洪汝方)이 읊은 언양 풍경이다.

소나무 숲 대나무 숲이 천 가호(家戶)를 감추고
산수는 반석을 휘감아 한 고을을 만들었네

돈돌매기
대곡리 돈밖고개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돌아앉은 지형으로 말미암아 생긴 이름이라 한다. ‘매기‘는 목에 접미사 ‘이‘가 붙은 말이다.
돈밖고개
동부리에 있는 고개로 언양읍성 동문 밖이 된다. 동문밖=돈밖으로 된 것이다.
돌빼기
동부리 460번지와 송대리 265번지 일대의 논에 바위가 총총 심어 놓은 것처럼 박혀 있어 이를 돌빼기라 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연산군 6년(1500)의 일이다. 토성으로 되어있던 언양읍성을 헐고 돌성으로 개축할 때, 도술을 잘 하는 마고(麻姑)할미가 고헌산(高 山)에서 매질하면서 돌을 몰아 왔다. 그러나 돌빼기에 왔을 때 읍성이 완공되었다는 말을 듣고 몰고오던 돌을 버리고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여기의 돌이다. 또 일설에는 힘센 장군 할미가 앞치마에 돌을 가득 담아 안고 오다가 축성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버린 돌이라 전해온다.
돌빼기에는 약 20년전까지만 해도 주막이 한 집 있어서 상북면 못안(池內)과 직동리 샛터로 내왕하던 길손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언양 장날 저녁에는 여기에서 큰 윷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문태(東門-)
동부리 276번지의 3에 있는 터로 언양읍성의 동문이 있었다.
동부리 선사유적(先史遺跡)
동부리에 있는 유적이다. 일제 때 한 석실 안에서 마제석검 2개가 출토된 것이 {조선마제석검의 연구}에 보고되어 있다. 지금은 그 고분의 위치를 알 수 없다.
동헌태(東軒-)
동부리 서북쪽 언양초등학교 자리에 있는 터이다. 옛날 언양고을의 동헌이 있었다.
뒷거랑걸
동부리 197번지 일대에 대한 지명이다. 1920년대 이전에 서부리 소똥섬 뒷편으로 흐르던 내가 황다리걸을 지나 동으로 흘러 마을의 뒷편으로 흘렀으므로 이 내를 뒷거랑이라 하였다. 이 뒷거랑 일대를 뒷거랑걸이라 하였다. ‘거랑‘은 내의 방언이며, ‘걸‘은 거리의 준말이다.
밤밭등
동부리 414-2번지 주변의 야산이다. 백여년 전부터 밤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 밤밭등이라 하였다. 한일합방 후 학교림이 되어 매년 포플러나무를 삽목하였으나 성림(成林)을 보지 못하였다. 지금은 조선견직 언양 새마을공장이 들어서 있다.
벅씨걸
동부리 124-4번지 일대로 동부리와 남부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옛날 동부리의 서낭신은 남장승이었으며, 남부리의 서낭신은 여장승이었다. 이 두 서낭신을 모신 곳이라 하여 벅시걸 또는 귀신걸·장승걸이라 하였다. ‘벅시‘는 벅수의 방언이다.
북문(北門)거리, 북문밖:북문외:붕밖, 북문태
동부리 221번지의 1에 언양읍성의 북문이 있었다. 그 터가 북문태이고, 그 밖을 북문밖(붕밖), 그 거리를 북문거리라 하였다.
새태:신기(新基):불맷둑
동부리의 대장간이 있었던 불맷둑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태(새터), 또는 신기(新基)라 하였다.
서문(西門)거리, 서문들, 서문태
동부리 327번지 1에 언양읍성의 서문이 있었다. 그 터가 서문태(터)이고, 그 거리를 서문거리 또는 서문들이라 하였다.
솔가지 공장터
일제말기인 1943년 경에 솔가지를 따서 솔가지 기름을 짜던 공장이 동부리 403-3번지 일대에 있었다. 이 솔가지는 학교의 아동을 동원하기도 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따 오게 하였다. 솔가지 기름은 대용연료이다.
숲뒷들
동부리 406-4번지 일대의 들이다. 약 백년 전부터 우거진 포플러 숲 뒤에 있는 들이라 하여 숲뒷들이라 하였다.
양사재(養士齋)터
동부리 221번지의 1에 있는 옛날 양사재의 터이다. 양사재는 향교가 쇠퇴하던 시기에 관민이 합심하여 세운 교육기관이다.
언양읍성지(彦陽邑城址):언양성터
동부리 북쪽에 있는 옛 언양읍성 터이다. 사적 153호로서 우리 나라 읍성 가운데 희귀하게 남아있는 성터의 하나이다. 언양읍성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언양읍성은 삼국시대에는 토성이었다. 1451년(조선 문종 1)에 석성(石城)으로 기공하여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완성하였으니, 무려 50년이 걸렸다. 둘레 약 1㎞, 높이 1.2m이다. 성 안에는 우물이 네 군데 있었다. 광해군 때 중수하였다. 이 읍성은 정방형의 돌로 쌓았는데, 네 귀에는 곡성(曲城)이 있고, 동서남북 맨 중간에 4대문과 문루가 있었다. 남문은 영화루(暎花樓), 동문은 망월루(望月樓), 서문은 애일루(愛日樓)이며, 북문만은 문루 없이 계건문(啓乾門)이라 하였다.
4대문과 성 귀퉁이의 중간마다 곡성 한 개씩이 있으며, 성 위에 첩(堞:사격하는 구멍)이 연접해 있어 좌우, 원근 어느 지점이고 사격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쌓을 때 성 자리를 본래 수평으로 했기 때문에 호(壕)에 물이 유입되지 않아도 수위는 감소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입성하여 4대문은 소실되었다. 호는 석성 안쪽의 보성(補城)이던 토성을 헐어 매축하여 논으로 바꾸었다.
1923년 언양성을 헐어 그 돌로써 남천 제방을 쌓았으니, 언양현민과 부근 지방의 주민들이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땀흘려 쌓은 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오무등(烏舞嶝)
동부리 42-2번지 일대를 말한다. 약 백년 전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 많은 까마귀 떼가 숲에 와서 놀며 마치 춤추는 듯하다 하여 오무등이라 하였다. 해방 직후까지는 홍역으로 죽은 어린애들을 묻고 삿갓을 덮어 두었던 애장터였다 한다.
옥새미
동부리 옥태 앞에 있는 샘이다.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데, 가뭄에도 줄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
옥태(獄-)
동부리 320번지의 1에 있는 터로 옛날 언양 고을의 감옥이 있었다 한다.
정등래(鄭登來):정다리
동부리의 황다리 동쪽에 있는 다리로 언양고을에 부임한 정현감이 놓았다. 아전들이 놓았다는 황다리를 헐고 그 아래 새로 다리를 놓아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였다는 설이 있다.
홍살문걸
홍문(紅門)이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남문의 북쪽에 위치한다. 홍살문은 궁전(宮殿)·관아(官衙)·능(陵)·원(園)·묘(廟) 등의 앞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이다. 둥그런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사롱(斜籠)을 가로 얹었다. 이를 홍문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였다.
황다리:황교(黃橋):황다릿거리
동부리에 있었던 다리이다. 정조 때 언양고을 아전인 황처오와 김석진이 놓았는데, 황처오의 성을 땄다. 뒤에 사또로 부임한 정현감이 아전들의 기를 죽이려고 이 다리를 헐고 새 다리를 놓았다 한다.

반곡리(盤谷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다개리(茶開里)에 속한 듯하다. 정조 때도 역시 다개리에 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종 때는 언양군 중북면(中北面)의 고하동(庫下洞)이었다. 1911년에 반곡(盤谷)으로 고쳤으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두북면의 천전과 구영의 일부를 합하여 역시 반곡리라 하여 언양면에 속하였다. 반곡 1개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광천들:광천평(廣川坪):강천들, 광천못, 광천보
다개리의 갈전(葛田)에서 흐르는 내를 광천이라 하며, 옥동(玉洞) 앞의 들을 광천들이라 한다. 여기에 광천못과 광천보가 있다. 광천은 ‘넓은 내‘를 뜻한다.
고하(庫下)
반곡리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고종 때는 반곡 전체를 고하라 하였다. 일제 초에 반곡이라 개칭한 뒤로는 마을이 언동(彦洞)·고하(庫下)·옥동(玉洞)·진티(進峴) 등으로 나누어져 하나의 소지명(小地名)으로만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고하는 평리에 있었던 사창(社倉)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이는 옛날 도기소 등의 특수 산업지를 뜻하는 ‘處(곳)‘를 이두(吏讀)로 곳(庫)이라 한데서 유래됐다. 평리의 도자기소도 고(庫)라 하였다.
고하마을 동쪽 능선에는 도굴이 진행중인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다.
달목비알:다리목비알
반곡리의 고하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다리가 있었다.
대롱골
반곡리의 고하와 진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대롱처럼 생겼다.
두루미
반곡리 달목비알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두리비(호로병)처럼 생겼다.
반곡(盤谷)
반구대에 출입하는 길목이 되므로 반구대의 ‘반(盤)‘을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언양 지방에서는 반구대를 비롯하여 반연(盤淵)·반천(盤泉) 등 지명이 있으며, 이는 다 반석(盤石)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반곡의 경우도 반석에서 비롯된 것으로볼 수 있다.
반곡사(盤谷祠)터
반곡리 솔배기에 있는 사당터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박언복(朴彦福)과 박인립(朴仁立) 부자를 받들던 사당이었다. 1840년(헌종 6) 반곡에 세웠다가 뒤에 상북면 길천리(吉川里)로 옮겨 충효사(忠孝祠)라 하였다. 박언복은 선무원종공신 3등이었으며, 아들 박인립은 1등이었는데, 부자가 다 왜란 때 전사하였다.
사창(社倉)터
반곡리 솔배기에 있는 사창터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농업협동조합 창고가 들어서 있다.
새터:신기(新基):언동(彦洞):솔배기
반곡리 고하 북서쪽 마을이다.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 곳에 효자 장계룡과 그의 모 파평 윤씨(尹氏)의 열행을 기린 양세정려각(兩世 閭閣)이 있다.
윤씨는 남편 장후시가 죽자 음식을 폐하고 눈물이 그칠 날이 없더니, 마침내 피눈물을 흘리다 두 눈이 실명하고 말았다. 이 때 아들 장계룡은 어머니가 밥을 먹을 때는 꼭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 드리는가 하면, 밖으로 나갈 때는 지팡이를 이끌고 어머니를 인도하였다. 그리고는 집 뒤에 단(壇)을 모아 어머니가 눈 뜨기를 하늘에 빌었다. 그런지 10년이 되어 지성이면 감천이라, 마침내 어머니의 눈이 나아 광명을 되찾게 되었다. 1867년(고종 4) 나라에서 그의 효행을 기려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다.
새터는 본래 솔배기라 하였다.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배기‘란 말은 ‘박이다‘ 는 말이다. 그 뒤에 새터라 하다가 지금은 언동이라 고쳐 부르고 있다.
옥동(玉洞):지경(地境)
반곡리의 마을로서 지경이라 부르던 곳이다 지경은 경주와 언양의 경계를 이루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지명은 강동면과 양남면의 경계에도 있다. 또 옛날에 옥이 났던 곳이라 하여 지금은 옥동이라 부른다.
우천원(宇川院)
반곡리의 고하에 있었던 원을 우천원이라 하였다. 조선초기 주요 관로에 30리 마다 관영 숙박시설인 원(院)을 두었다가 임진왜란 후에는 이를 폐지하였다. 북으로는 구량의 구라불말원(仇良火村院), 남으로는 언양의 보통원(普通院)에 이어졌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서울지역 내의 원은 5부(五部)에서,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을 정하여 원주(院主)로 삼고, 한성부와 관찰사가 감독하였다. 원주의 수는 대로 5호, 중로 3호, 소로 2호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하였다. 울산지방의 관로는 모두 소로에 해당되었다. 이 원을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는 평천원(平川院)이라 하였다.
진티:진현(進峴)
반곡리의 진티는 위 진티와 아랫 진티가 있다. 위 진티가 여기의 진티이고, 아랫 진티는 두동면 천전리에 속한다. ‘티‘는 우리 지명상 고원(高原)을 뜻하는데, ‘知·遲·旨‘가 다 ‘티‘의 뜻을 가진다. ‘진‘은 길다의 방언 ‘긴‘이다. 그러므로 진티는 긴 고원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진(進)‘자는 그 자체가 뜻을 가진 것이 아니고, 진(永,長)의 음차(音借)에 해당된다. 그리고 현(峴)은 티의 훈차(訓借)이다.

반송리(盤松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반송이 늘어졌다 하여 반어리(盤於里)라 하였다가, 고종 때 반송(盤松)이라 하여 상북면에 속하였다. 1911년 반소(盤所)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고쳐 반송리라 하고 언양면에 속하였다. 반송리는 반송상리·반송중리·반송하리 세 행정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반상(盤上)·반중(盤中)·반하(盤下)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옛날 솔배기라는 큰 소나무가 들 가운데 좋은 정자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 노송의 둘레가 안반(案盤)을 만들 정도로 컸다. 이로 말미암아 반송이라 부르게 됐다.
가무곡(歌舞谷):가무골, 가무다리
반송리의 장촌 서쪽 골짜기이다. 가무골에 있는 다리를 가무다리라 한다. 가무곡은 노래하고 춤을 추는 골짜기로 그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공촌(孔村):반송중리
반송리의 장촌 동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옛날에 공씨가 처음 개척하였다 한다. 반송리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반송중리라 한다.
교동제(橋洞堤):교동못:골안못
반송리 골안골에 있는 못이다. 옛날에 다리가 있어서 교동 또는 다릿골이라 부른 듯 하다. 그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반송들
반송리의 장촌 앞에 있는 들이다. 반송리의 이름을 따서 반송들이라 한다.
반송상리(盤松上里):장촌(張村)
반송리의 맨 윗쪽 마을이 되므로 반송상리라 한다. 행정마을이다. 장씨들이 처음 마을을 이룩하였으므로 장촌이라 한다.
반송하리(盤松下里)
반송리의 아랫쪽 마을로서 행정마을이다. 원반송·황사골 등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반송징이:솔배기
반송 남쪽 들 가운데 있었던 소나무이다. 옛날의 소나무는 너무 오래되어 쓰러졌다. 지금은 농막을 지어 쉬며 노는 곳이 되었다.
부엉딤
반송리 산 144번지의 절벽처럼 된 돌산이다. 부엉이는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알을 품는 습성을 가졌다. 그러니 부엉이가 집을 지어 서식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딤‘은 ‘디미·되미‘라고도 한다. 옛날에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전기 고압선이 이 곳을 지나고 있어 감전되어 죽는 경우도 있다.
사다리 배미
반송리 장촌 북쪽에 있는 논으로 모양이 사다리처럼 생겼다.

서당골
반송리 가무골 북쪽 골짜기로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
와소뻐든
반송리의 동내뻐든 서쪽에 있는 밭이다. 옛날에 기와를 굽던 곳(瓦所)이다. 뻐든은 버덩의 방언으로 펀펀한 지형을 말한다.
원반송(原盤松)
반송의 본마을이므로 원반송이라 한다. 고종 때 반송이라 하였다. 1911년 반소라 하였으나 1914년 다시 반송이라 하였다.
이 마을 37-1번지(산)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죽도가리
반송리의 황새골 동쪽에 있는 논이다. 어느 흉년에 죽을 주고 이 논과 바꿨다 한다.
줄맷등
반송리의 공촌 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묘가 줄지어 늘어서 있으므로 줄맷등이라 한다.
탕건바우
반송리의 장촌 동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 생김새가 탕건처럼 생겼다.
헌득산 (獻得山)
반송리의 동북쪽에 있는 산을 헌득산이라 한다. 이름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 서쪽에는 감동산과 꼰지박산이 있다.
황사골 (黃沙谷):황새골
반송리 원반송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황새골 또는 황사골이라고도 부른다. 뒷산에 황새가 와서 놀았다 하여 황새골, 토질이 황사질이므로 황사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반연리 (盤淵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옹곡리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때는 상북면의 천소에 속한 듯하다. 1894(고종 31)년 상북면에 속한 부제리였다.
1911년 반호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부·반곡·반호의 각 일부씩을 합하여 반연리라 하였다. 못이 많으므로 반연·반호라 하였다. 행정마을은 반연마을 하나이다.
가막못:오지(烏地):부제(釜堤):부지(釜地)
고종 때는 부제로 한역한 마을이다. 토골 남쪽에 있는 못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형이 가마솥 같으므로 ‘가매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까마귀가 날아온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못의 토질이 검은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는 ‘ 못(神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 ‘은 신(神)의 옛 말로서 김·검·금·곰 등으로 호전되어 解慕·蓋馬·金馬·乾馬·固麻·錦·今·黔·黑·釜·熊·孔·肝·檢·儉 등으로 음차 또는 훈차되었다. ‘ ‘이 붙은 지명은 유현(幽玄)한 곳인데, 가막못은 용신이 깃드는  터(神鄕)로 신성시해 온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개고개:묘령(猫嶺)
반연과 태기의 사이의 있었던 고개이다. 지금은 사연제에 수몰되었다. 고개의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 하여 괴고개(猫嶺)이라 하였다. 개고개는 괴내기고개가 변한 말이다. 괴내기는 고양이의 방언이다.
반곡정사터(盤谷精舍터)
반연리 아랫옹태 동쪽에 있는 터이다. 조선시대 감찰 벼슬을 지낸 김영택이 세웠고, 승지 정만조가 기(記)를 썼다.
반연(盤淵)
반(盤)을 그대로 습용(襲用)하면서 반호의 호(湖) 대신 연(淵)으로만 바꾼 것이 ‘반연(盤淵)‘이라는 이름이다. 반호는 이 곳에 못이 많아 불리운 이름이다.
버미터골
반연리 찬물내기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범이 많았다 한다.
아릿옹태
반연리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반연리의 원 마을인데 사연댐에 수몰되어 없어졌다. 윗옹태는 태기리, 아랫옹태는 반연리에 속했다.
세연동(洗淵洞):세인동
반연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사연댐에 수몰되어 없어진 마을이다. 세인은 산에 둘러 쌓인 것을 뜻하는 ‘싸인‘이 변한 말이다.
점골(店谷)
반연리 톡골(토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
정무공묘(貞武公墓):빗골
반연리 가막못안 북쪽에 있는 묘이다. 비석이 서 있으므로 빗골이라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은 경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참전하여 공을 세운 후 경상좌도병마우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주 영장(營將)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용인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찬물내기
반연리 작은 웅굴골 남쪽 골짜기로 찬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다.
토골:톡골:굼쏘:텃골:반호(盤湖)
반연리의 한 자연마을이다. 톡골·텃골·토골·굼소라고도 한다. 또 반호(盤湖)라 하면 이 마을을 지칭한다. 마을의 형세가 토끼(兎)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옹기 흙을 파낸 자리가 굼깊다 하여 굼소라고도 부른다는 설 등이 있다.
한편으로 독골(瓮谷)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생각된다. 예종 때의 옹곡리(瓮谷里)가 분화되어 옹(瓮)을 그대로 음독하여 마을은 옹태(擁台)가 되고, 훈독(訓讀)한 마을 이름은 독골이라 하였던 것이 토골 또는 톳골로 변한 것이다. 울산지방에는 옹기터에서 비롯된 ‘독골‘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있다.

반천리(盤泉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옛날 언양군 상북면의 지역이었으며, 천소리(泉所里)라 하였다. 1911년 천상(泉上)과 천소(泉所)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소에 반호(盤湖)와 반송(盤松)의 각 일부씩을 합하여 반천리라 하고 언양면에 속하였다. 반천리는 천소(泉所)와 미연(米淵)1·미연2·미연3 네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315번지(전) 일대에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고모산(古毛山):고무재:고무령(顧毋嶺):곰재:웅현(熊峴)
반천에서 어음하리로 넘어가는 재(嶺)를 고무재라 한다. ‘곰재‘ 또는 ‘곰우재‘라고도 한다. 어음하리로 넘어가는 꼬불꼬불하고 긴 재이나 성질이 순한 곰과 같다 하여 곰재라 부른다 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어음하리 동편에 있는 산을 예로부터 고모산(古毛山)이라 하여 주장고모(走獐顧母)의 형세를 가졌다고 전해온다. 고무재는 이 산의 형국 ‘고모(顧母)‘에서 유래된 것이 ‘고무‘로 변하였거나, 신(神)을 뜻하는 옛말 ‘ ‘ 계열어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여기에 있는 마을도 고무재라 하는데 안고무재가 따로 있으며 미연(米淵)에 속한다.
당미기고개
반천리 소먹이에서 서쪽 어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미기고개라 한다. 당(堂)은 서낭당, 즉 고갯길에 돌을 던져 쌓아 올리면서 길의 안전을 바라던 곳이다. ‘미기‘는 ‘목(項)이‘가 변한 말이다.
대청들
반천리 살소에 있는 들이다. 대청(大廳)같이 넓은 들이라 하여 대청들이라 한다.
모래들
반천리 샘소에 있는 들이다. 강가에 있어 들의 바닥이 모래이므로 모래들이라 한다.

미연(米淵)·살소·살수
반천리의 천소 아랫 마을이다. 물가의 들에 있는 마을에 살수(薩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우리 옛말로 ‘새‘라 하였다. 索·素·新이라 쓴 옛 지명은 다 그 차자(借字)였다. 또 이 ‘새‘는 沙·薩·嵯·西·斯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새‘와 같은 뜻을 가진 ‘살(薩)‘은 그 음이 가지는 뜻을 따라 쌀(米)로도 변하였다. ‘쌀소‘ 또는 ‘쌀수‘가 이것이며, 여기서 다시 미연(米淵)이란 이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살(薩)은 ‘살(矢·箭)‘로 변하였고, 살(矢)은 ‘활(弓)‘과 짝하니 활이 되었고, 활(弓)은 다시 ‘활(活)‘이 되었다. 두서면의 ‘살그내(箭川)‘가 변한 지금의 활천리(活川里)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미연(米淵)이나 살수·살소는 다 살수(薩水)에서 나온 말로서 물가의 들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 청천강(淸川江)의 옛 이름 살수(薩水)와 같은 것이다. 울산지방에는 이 ‘살(薩)‘에서 유래된 마을이 한 마을 더 있다. 온산면 덕신리의 살건내 마을이 그것이다.
배락소·배락더미
범서읍 넘내에서 살소로 넘어오는 가파른 벼랑을 배락더미라 하고, 그 아래의 강을 배락소라 부른다. 흐르는 급류가 산 밑을 들이받는 소리가 벼락치듯 하므로 배락소라 했다. 그러나 이 곳은 가파른 벼랑(斷崖)을 이루고 있으므로 ‘벼랑소‘가 와전되어 배락소라 하였을 것이다. 또 배락더미라 하는 것도 벼랑더미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더미‘는 흙더미 돌더미 산더미라 할 때의 더미인 것이다. 배락소는 울산∼언양 고속도로를 축조하면서 메워졌다.
샘소:천소(泉所):새미소
반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고종 때의 {언양읍지}에는 천소(泉所)라고 나타나며, 뒤에도 일관하여 천소라 불러 온 마을이다. 마을의 샘이 수량이 풍부하고 크다 하여 새미소라고도 하였다. 우물을 방언으로 ‘새미‘라 한다. 이 곳 426번지(임야) 일대에서 삼국시대 취락유적이 발견되었다.
삼밭골
천소마을 뒷산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삼(麻)을 재배하는 밭이 많았다.
못골도랑
삼밭골에서 발원하여 천소 마을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작은 도랑이다. 삼밭골에는 작은 못이 있었다.
연당(蓮塘)
천소 마을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마을에 불이 나면 이 곳의 물을 길어다 진화했다.
세월교(洗越橋):천암교(泉岩橋):대천교(大泉橋)
천소에서 남천을 건너 대암으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남천의 수량이 많아지면 물에 잠기는 잠수교이다. ‘세월(洗越)‘은 물이 다리를 씻으면서 넘어간다는 뜻이니, 곧 잠수교를 뜻한다. 천소와 대암을 연결한다 하여 천암교(泉岩橋)라 한다. 대암 사람들은 대암에서 천소로 건너가는 다리라 하여 대천교(大泉橋)라 부른다. 대암댐을 건설할 때 함께 축조하였다.
소머기
반천리 고무재에서 서쪽으로 들어간 마을을 소머기라 부른다. 소를 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미연에 딸린 마을로 이 곳의 못을 소머기못이라 한다.
‘소머기‘는 ‘소목(松項)‘이 변한 말일 것이다. 높이 솟은 산을 흔히 솔봉 또는 솔뫼라고 하고, 솔봉을 한자로 송봉(松峯)이라 한다. 소머기의 ‘소‘는 이 솔봉(松峯)이 준 말이며, 머기는 ‘목(項)‘을 이르는 말이다. 목(項)은 통로(通路)의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으로서 길목·물목·섬목·건널목 등의 말이 있다. ‘머기‘는 목(項)에 처소격인 접미사 ‘이‘가 붙어 변한 말로서, ‘미기‘ ‘매기‘ 등으로도 발음된다. 그러므로 소머기는 어음(於音)으로 넘어가는 솟은 길목이란 뜻을 가진 말이 된다.
큰골
반천리 고무재 마을에서 고무재 못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크다 하여 큰골이라 부른다.
헌디골
반천리 살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작은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는 것이 머리에 헌디(종기의 울산 방언)가 난 것 같다 한다.

서부리(西部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언양군 상북면에 속한 북부리(北部里)였다. 1911년 언양읍내를 서부·동부·노동·남부로 갈라 서부동(西部洞)이 되었으며, 역시 상북면(上北面)의 관할하에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는 노상동(路上洞)을 합하고 서부리라 하여 언양면에 속하였다. 언양읍의 서쪽을 뜻한다.
행정상 방천(防川)1·방천2·방천3·서부1·서부2리 다섯 개 행정마을로 되어 있다.
방천(防川):방천미기
서부리의 남천내 북안에 제방을 쌓아 방천 또는 방천미기라 하였다. 이 방천미기가 마을 이름으로 된 것이다. 여기서 ‘미기‘는 ‘막(防)이‘가 변한 말이다. 영남지역에서 서낭신(城隍神)을 골매기라 할 때의 ‘맥(防)이‘와 같은 뜻이다. 그러니 ‘방천미기‘라 하는 말은 ‘방천(防川)‘과 ‘막(防)‘이 중첩된 말이다. 웃 방천미기와 아랫 방천미기의 두 마을로 구분하기도 한다.
부리보
서부리의 방천미기 서쪽에 있는 보로 상북과의 경계에 있다. 불(火)에서 비롯된 부로산(夫老山)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보아진다. ‘부리‘가 줄어 ‘불‘이 된 것이다. 혹은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성밖에:선바께:서문밖에
옛날 언양읍성의 서문을 애일루(愛日樓)라 하였다. 이 서문의 밖에 있는 마을이므로 성문밖에라 한다. 방천미기의 북쪽에 있다.
소똥섬
서부리 107번지 일대를 소똥섬 또는 우분도(牛糞島)라 불러왔다. 1920년대 이전에 언양에 큰 홍수가 나서 부로산(夫老山-烽火山) 끝봉인 마위보 안 바위에 부딪친 물굽이가 서부리의 마을쪽으로 흘러 마을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이 때 앞에는 남천내가, 뒤에는 뒷거랑이 새로 생기고, 가운데에 섬이 생겼다. 이 섬이 마치 물에 뜬 쇠똥처럼 생겼다 하여 소똥섬이라 불렀다.
1923년 4월에 기공하여 1927년 3월에 준공을 보게 된 남천 호안공사로 말미암아 뒷거랑은 없어지고 소똥섬은 지금 택지로 변하였다.
언양(彦陽)지석묘(支石墓)
서부리 232번지에 있는 고인돌이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이다. 지석묘가 아니라는 학자도 있어 양론이 엇갈리고 있다.
언양호안(彦陽護岸)
서부리의 남천내는 자주 범람하여 위협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해마다 방축의 수리 보강공사를 되풀이해 왔다. 마침내 1923년에 기공하여 5년간의 긴 공기 끝에 1927년 3월에 456간(間)의 공사를 마쳤다. 여기에 소요되었던 돌은 언양읍성을 헐어낸 돌이다.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2만7천7십6엔(円)이 들어갔다.

송대리(松臺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송도리(松道里)라 하였다가, 성종 때는 송동(松洞)이라 하였다. 고종 때는 송북(松北)이라고 하여 상북면(上北面)에 속했다가, 1911년에 송대(松臺)로 고치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그대로 송대리라 하여 언양면에 속하였다. 앞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므로 소디 또는 우후(牛後)라고도 불렀다.
구교동( 校洞):귀기동:귀깃골
옛날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구교동( 校洞)이다. 방언으로 귀기동, 귀깃골이라 한다. 송대리의 천주교 언양성당 근처에 있던 언양향교(彦陽鄕校)는 삼남면 덕천(德川)으로 옮겨 갔다. 울산시 반구동에도 구교동이 있다.
낙답 닷마지기
송대리의 능골 앞에 있는 다섯 마지기 논이다. 비가 조금만 와도 물에 씻기므로 ‘낙답‘이라 한다.
내곡(內谷):안골
송대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내곡 또는 안골이라 한다. 와우형(臥牛形)의 산이 있는데, 그 안쪽이 된다. 내곡 마을 서쪽 능선 일대는 무문토기 및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능골:능곡(陵谷)
송대리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려 고종 때 시중(수상)을 지낸 위렬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묘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능골이라 한다.
번깃고랑
송대리의 능골 앞으로 흐르는 작은 내이다. 비가 조금만 와도 번개처럼 물이 불어나므로 번깃고랑이라 한다.
봉화사:석굴암
송대리 화장굴 안에 있는 절로 굴 안에 절이 있다 하여 석굴암이라 한다.
성마실:성리(城里)
송대리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언양읍성 아래에 있으므로 성리라 한다.
소디:송동(松洞):소돌말:송도리(松道里)
송동·소디·소돌말은 송대리의 옛날 이름이다. 예종 때는 소돌말이라 하여 추성못까지도 관할 안에 있었다. 고종 때의 기록에는 송북(松北)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道)는 고지명에는 음이 ‘돌‘로 나타난다. 정인보(鄭寅普)선생은 ‘도(道)‘는 곧 ‘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李丙燾) 박사에 의하면, 우리의 옛말에 산(山)·봉(峰)·악(岳)·영(嶺)과 같은 솟아난 곳을 ‘소리·솔·수리·술‘이라 한다. 소리산(所利山) 솔이산(率伊山) 수리산(鷲山) 수리산(修理山) 수리산(車衣山) 솔산(所乙山) 등이 여기서 나온 이름이다. 수리·술·소리·솔은 ‘용출(聳出)·용출(湧出)·초출(超出)·수출(秀出)·고출(高出)·역상(逆上)‘을 나타내는 말로서 ‘솟·소슬‘에서 생긴 말이라 하였다.
도처에 흔히 보는 송산(松山)·송봉(松峰)·송악(松岳)들의 솔(松)도 역시 그러한 의미의 말을 동훈이자(同訓異字)로 썼을 따름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성(神聖)·고위(高位)·수위(首位)의 뜻으로 통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송동(松洞)의 뜻은 위열공 김취려의 생장지라는 점에서 ‘숭동(崇洞)‘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소디‘는 내골(內谷) 앞의 작은 산이 소가 누운 것 같다 하여 ‘소뒤‘라 하다가 뒤에 송대(松臺)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소디라 하여도 역시 송동(松洞)의 뜻이 된다. 솔(松)의 고음은 ‘소‘이다. ‘디‘는 ‘들(野)‘ 또는 마을을 뜻하는 말로서, 이 ‘디‘는 ‘지·기‘와 호전(互轉)하는 성질을 가졌다. 옛 지명에 나오는 디(知)·지(支)·기(只)는 소디의 ‘디‘와 같은 의미를 가졌으나, 소디의 경우에는 ‘대(臺)‘로 차자하여 송대(松臺)가 된 것이다.
그런데 소디나 송대(松臺)를 크게 볼 때는 마을 전체를 말하는 것이나 좁게는 내골(內谷) 앞의 낮은 산을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송대의 ‘송(松)‘은 ‘솟·소슬·수리·술‘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신성(紳聖) 고위(高位) 수위(首位)와 통하는 것이니 위렬공(威烈公)의 생장지를 신성시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송대리 지석묘(支石墓):명바우:장군바우
송대리 금선사(金仙寺) 바로 앞에 있다. 이 돌에는 여러가지 설화가 있고, 이름도 여러가지이다. 축지바우라 하는가 하면 장군바우라고도 한다. 서부리의 언양지석묘와 같이 다섯 개의 돌이 있어서 옛날 장수들이 이것으로 공기놀이를 했다 하여 장수살구돌이라고 한다. 또 이 바위에 사람들이 와서 장수(長壽)를 빈다하여 명(命)바우라고도 부른다.
이 명바우의 뒷편에도 두 개의 바위가 있으며, 소디에 있었던 것은 깨어져 없어졌다. 이 명바우와 그 뒷편에 있는 두 개의 바위를 고인돌로 보고 있다. 높이 3m, 넓이 4㎡이다.
안태방우
송대리 화장산 방우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위열공이 태어날 때 그의 태를 자른 가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다.
야지당터:여제단터( 祭壇-)
송대리의 땡비알 아래에 있는 터이다. 옛 언양 고을의 여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여제단은 자손이 없어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길가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죽은 귀신 등을 위하여 고을에서 제사지내던 곳이다.
염천(廉泉):옥천(玉泉)
송대리 화장산(花藏山)의 화장굴(花藏窟)에 있다.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으로, 부정한 사람이 와서 이 물을 마시면 냄새가 나거나 혹은 물이 마르기도 했다. 옥천이라고도 한다. 이는 물이 맑은 샘을 뜻한다.
위열공묘(威烈公墓)
송대리 능골 서북쪽 화장산에 있는 고려 고종 때의 위열공 김취려(金就礪)의 묘이다. 김취려의 본관은 언양이다. 거란의 침입했을 때 출전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주역이 되었고, 한순(韓恂), 다지(多知) 등 의주적(義州賊)을 평정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이 누진하여 시중(侍中)에까지 이르렀다가 1234년(고종 21)에 세상을 떠났다.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 큰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정색하여 부하를 통솔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
위렬공 태지유허비(胎地遺墟碑)
송대리 능골에 있는 비이다. 위열공 김취려의 태를 묻은 곳에 세운 유허비이다. 그의 묘 아래에 있다. 1857년(철종 8)에 세웠다. 1970년 동대리 15번지로 이전하고 1977년 10월 비각을 세웠다.
해산바우(解産岩)
이 바위에서 위열공을 낳았다 하여 해산바우라 한다. 가위 터와 실패 터 등의 흔적이 있다 한다. 위렬공묘의 동남쪽 약 400m 떨어진 곳에 있다.
화장굴(花藏窟), 화장암터
송대리 귀깃골 북쪽 화장산 중허리에 있는 굴이다. 높이 2m, 길이 6m, 넓이 25평이며, 굴 안에 염천(옥천)과 화장암(절)터가 있다.
신라 때 화장산에 사냥꾼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산에서 곰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곰에 물려 죽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오누이는 눈 쌓인 산을 헤메다가 그들도 산 속에서 죽고 말았다. 이 때 부모의 죽은 영혼이 아들 딸의 죽음을 가엾게 여기고 그 영혼을 복숭아꽃이 되게 하여 따뜻한 양지쪽에 피어나게 하였다.
그 후에 신라 왕이 큰 병이 들었으나 백약이 무효라서 여러 신하가 근심하였다. 이 때 한 의원이 복숭아꽃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때가 겨울철이라 복숭아꽃을 구할 길이 없었다. 사자(使者)를 사방으로 보내어 이 꽃을 구하게 하였는데, 한 사자가 언양에 이르러 남문 밖에서 화장산 쪽을 보았더니 한 그루의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를 본 사자는 뛸듯이 기뻐하며 이 꽃을 꺾어 급히 환궁하여 왕께 드렸다. 이 꽃을 먹은 왕은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사자가 이 꽃을 꺾자 떨어져 시들어 버린 꽃술이 오빠의 넋은 대숲이 되고, 누이의 넋은 솔숲이 되었다 한다.
{언양읍지}에는 이 전설이 다르게 수록돼 있다. 신라 왕이 병이 들어 점을 치니 복숭아꽃이 효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기(天氣)를 보는 자가 아뢰기를 남쪽으로 나가면 꽃을 구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엄동설한인데, 신하가 꽃을 구하러 화장산에 이르렀다. 굴 가운데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 있어 달려가 보니 한 비구니였다. 이름을 물으니 도화(桃花)라 대답하였다. 신하는 도화를 데리고 서울(경주)로 돌아가 왕께 아뢨다. 그녀를 본 왕이 크게 기뻐하여 병이 나았다.
화장산(花藏山)
송대리와 상북면 향산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 265m이며 화장굴과 화장암 설화로 유명하다(화장굴 설화 참조).
어음리(於音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언양군 상북면의 지역으로서 너른 들이 있으므로 너리미·나리미라 불렀다 한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중남면(中南面)의 평리(平里) 일부를 합하고 언양면 어음리가 되었다. 어음상리(上里)와 어음하리(下里)의 두 행정마을이 있으며, 이를 줄여서 어상·어하라 부르고 있다. 언양중학교, 울산자연과학고 등이 있다.
이 곳에는 다음과 같은 풍수지리의 전설이 전해온다. 어음리는 화장산을 배경으로 남쪽은 남천내(南川), 북쪽은 고헌산에서 발원한 감천(坎川:감내거랑)이 동리를 둘러싸고 흘러 최하단부에서 양수(兩水)가 합류되며, 여기에 형성된 삼각주를 요도(蓼島)라 한다. 이 곳이 배가 떠 간다는 행주형(行舟形)이다. 마을 중앙에는 아직도 짐대가 두 곳에 있다. 그런데 어음하리에는 우물이 한 곳 밖에 없으므로 부자들이 살고, 어음상리는 배 밑에 구멍을 많이 뚫어 마을에 우물이 여러 군데 있으므로 물이 새어 부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음리에는 당신제(堂神祭)가 있다. 음력 정월 보름에 지내던 동제로서 지신(地神)밟기 등 여러가지 행사가 열린다. 이 어음상·하리의 당사신(堂社神)은 부부간이라 한다. 어음상리 신위는 요도지신(蓼島地神)으로 남신(男神)이고, 어음하리의 신위는 이사신(里社神)으로 여신(女神)이다. 따라서 어음상리의 신에게는 곡자주(막걸리)를, 어음하리의 신에게는 감주(甘酒)를 사용하고 있다.
봉제원(奉祭員)은 연초에 적임자를 추천하는데, 봉제원이 되면 7일 전부터 가족 전원이 목욕재계하고 문전에 금기(禁忌)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엄금했다. 제수를 만드는 부인들도 모두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 제관(祭官)은 헌관(獻官) 집사(執事) 축관(祝官) 등 3명이다.
갓비알산:진살미산
어음상리의 동편에 있는 산이다. ‘갓‘은 숲(森)을 말하며 ‘비알‘은 급한 경사진 상태를 이른다. 따라서 갓비알산은 갓바른 숲산이란 뜻이 된다. 직동에서 장촌까지의 산세를 주장고모(走障顧母)의 형이거나, 혹은 용두(龍頭)의 형세라 하여 용두에 줄을 걸어 용머리를 돌리게 했다 한다. 이 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낼 때 경사가 급하므로 나무를 묶어서 끌어 내렸다.
보통원(普通院)터
어름상리에 있는 옛 보통원의 터이다. 보통원은 북으로는 우천원(于川院), 남으로는 신원(新院)·저촌원(猪村院), 서쪽은 석남원(石南院)에 이어졌다. 조선초기 전국의 주요 관로에 원(院)을 두어 여행자들의 숙식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대체로 30리마다 하나를 두고 관찰사가 감독하며 수령이 관리하였다.
불선바위
어음리 갓비알산 아래에서 감내(坎川)를 내려다 보는 큰 바위이다. 촛불을 밝히고 소원성취와 무사태평을 빌던 곳이기에 불선 바위라 불렀다. 우리의 민속신앙에 암석을 신성시하며 모시던 풍속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살대배기
어음상리 동북쪽에 있는 산이다. 옛날 화살을 만드는 산죽(山竹)이 많이 나던 곳이라 살대배기(箭竹植)라 하였다. 배기는 박혀 있는 형태를 뜻하는 말이다.
어음(於音)
언양의 옛 기록에 의하면, 요도(蓼島)는 배산(背山)이 흡사 주장고모(走獐顧母)의 형세를 띠고 있다 하여 어음(於音)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은 어음(於音)의 우리 말 ‘느리미·너리미‘에 대한 유래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어음의 뒷산을 주장고모라 하는 것은 고모산과 고무재가 뒷받침해 준다. 어음 동편의 산을 고모산, 어음하리에서 반천(盤泉)으로 넘는 재(嶺)를 고무재라 한다. 고무재는 고모재(顧母嶺)가 변한 말이다. 양자는 다 고모에서 나온 이름이다.
노루를 옛날에는 ‘나리‘라 하였고, 지금도 ‘노리‘라고도 한다. 암노루는 ‘느렁‘이라 한다. 노루가 가지고 있는 뜻이나 음이 옛 지명에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먼저 ‘장(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백제의 장항구(獐項口)가 그것이다. 또 이것이 ‘나리(津)‘로 변하기도 하였으니, 나리(獐)가 ‘나루‘인 나리(津)로 변한 것이다. 또 ‘연(延)‘으로 나타나는 곳도 있으니 경산(慶山)의 옛 이름 장산(獐山)은 ‘느리뫼‘인 마연(馬延)이 변한 것이다.
그리고 ‘어(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은데, 그 한 예가 바로 어음(於音)이다. 마을의 뒷산을 노루로 보아 ‘나리뫼(獐山)‘라 하던 것이 ‘느리미‘로 변하여 이것을 이두로 쓴 것이 오늘의 어음(於音)이다. 어음(於音)의 음(音)은 약음차(略音借) ‘ㅁ‘이 된다. 그러나 ‘느리‘를 훈차(訓借)한 것이 ‘於‘이며 ‘미‘를 음차(音借)한 것이 바로 ‘音‘이 되어 어음을 ‘느리미‘라 발음하여 오던 이두(吏讀)의 독법이 사라지면서 어음(於音)이라 한 것이다.
근래의 지명에서 ‘느‘나 ‘늘‘을 훈차(訓借)하여 어(於)를 쓴 곳이 많이 있다.
늘의골 서울시 어의동(於義洞)
늘으메 서천 어리(於里)
어물리 울주군 강동(於勿里)
어음상리(於音上里)
어음리를 상·하로 나누어 서쪽을 어음상리, 동쪽을 어음하리라 부른다. 행정마을로 ‘어상‘이라고도 한다.
어음하리(於音下里)
어음을 동서로 갈라서 동쪽편에 있는 마을을 어음하리라 부른다. 행정마을이다. 줄여서 ‘어하‘라고도 부른다.
요도(蓼島)
어음리를 신라 때는 요도(蓼島)라 하였다. 요도에 관한 설화는 1937년 7월에 발간한 {언양면세일반(彦陽面勢一班)}에 수록되어 전해온다.
어음 마을은 신라시대에 6조대신(六朝大臣)이 거주하여 신라조정 80리 길을 경주의 조신들이 내왕하였던 곳이다. 신라말기에 이르러 재상(宰相)인 나승상(羅丞相)이 이 곳을 요도라 칭하였다.
그런데 신라 때의 수도(首都)는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본피부(本彼部)·모량부(牟梁部)·한기부(漢岐部)·습비부(習比部)의 6부 외에 소읍(小邑)과 전원지역이 포함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한다. 이러한 왕경의 영역은 고려가 설치하였던 경주와 대체로 같은 넓이로, 수도의 방위를 목적으로 한 6기정(六畿停)이 이 지역 안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궁성과 관청이 몰려 있었던 중심지 이 외에는 각부 귀족들이 모여 사는 소읍이 기내(畿內)에 있었으니, 신라 왕경은 지금의 경주시와 인근지역이 좀 더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양면세일반}의 6조신 거주설은 신빙성이 있으며, 요도가 신라 때의 관사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도 그럴 듯하다.
요도는 1376년(우왕 2)에 정몽주(鄭夢周)선생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있을 때 이인임 등의 배명친원(排明親元)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울주의 요도로 귀양가라는 명을 받고 울주에 와서 그 섬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 봐도 그러한 섬은 없었다. 그러다 언양현에 요도라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더니 과연 거기에 있어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요도신사(蓼島神社)
어음의 동제당을 요도신사라 한다. 신사(神社)란 말은 얼핏 일본의 신사인 듯 하나 그렇지 않다. ‘사(社)‘는 두레와 같은 것으로 제신(祭神)하는 집회소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사회(社會)라는 말의 본뜻도 춘추사제(春秋社祭)때 거기서 대화하고 향읍(鄕邑)의 대사를 의논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용당수(龍 水)
어음하리의 도축장 남쪽 건너편에 있으며, 물굽이가 산기슭을 치던 깊은 소(沼)이다. 옛날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 한다. 이렇게 깊은 소이기 때문에 용이 잠겼다 하여 용당수(龍 水)라 불렀다.

살대배기
어음상리 동북에 있는 산이다. 옛날 이 산에서 나는 시누대로 화살을 만들었다.
언양 미나리
어음리 앞들에 수만 평의 미나리꽝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미나리는 남천 맑은 물에서 생장하였으므로 향기롭고 맛 좋기로 이름이 났다. 옛날에는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우시장(牛市場):소전거리
어음하리 앞 냇가에 있는 소를 거래하던 시장이다. 1979년 동부리에서 이 곳으로 옮겼다.
조산배기
어음리 나리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인공적으로 쌓은 조산(造山)이므로 조산배기라 한다. ‘배기‘는 ‘박이다‘의 ‘박이‘가 변한 말이다. 장승이 있었던 곳을 장승배기, 솔을 심은 자리를 솔배기, 돌이 박혔던 곳을 돌배기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옛날, 어느 현감이 다루기 어려웠던 아전 모씨(某氏)를 누르려고 지리풍수설을 좇아 조산(造山)한 것이라 한다.

직동리(直洞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골짜기가 곧으므로 고든골(곧=直)·직골·직동이라 하였다. 본래 언양군 중북면의 지역이었다. 1911년에는 직동과 남동(南洞)으로 나누어졌고,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직동, 남동에 기지(機池) 일부를 합하여 언양면에 편입되었다. 신화(新華)와 신흥(新興) 두 행정마을이 있다.
이 곳 직동리 343-6번지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이, 산 40번지(임야) 일대에서는 삼국시대 석곽분 등이 발견되었다.
가재굴
직동리 산 130번지에 있는 짧은 골짜기이다. 산의 생김새가 가재의 집게처럼 생겼고, 또 산가재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가재골이라 불렀다.
감내:감천(坎川):감내거랑
직동리 곧은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감천 가에 마을이 있다. 감천은 고헌산(高 山)에서 발원하여 반송리에서 남천에 합류한다. 감내는 방위상 북방으로 흐르는 내로서 남천(南川)에 대응되는 북천(北川)의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또, 진산(鎭山)인 고헌산에서 발원하므로  내(神川)의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감(坎)은 ‘ ‘의 음차(音借)이다.
고려장산
직동리 185번지에 있는 산이다. 고려장을 한 분묘가 있어 고려장산이라 불러왔으나, 1960년경에 도굴당하고 봉분만 남아있다. 그 무덤 앞에는 직동리에 사는 서(徐)씨의 조상묘가 있다.
관정(觀亭)
직동리 새각단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흔히 관진이라고 부른다. 들 가운데 마을인데, 들 가운데 숲이 있어 정자를 이루었던 곳이라 하여 관정(觀亭)이라 한다. 윗 관정이란 마을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관정들
직동리의 관정 마을에 있는 넓은 들을 관정들이라 한다. 한편으로 이 들을 관정들(官定坪)이라 하여 위열공(威烈公)의 묘에 딸린 들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구름보
직동리 1017-2번지의 남쪽에 있는 작은 보(洑)이다. 와송저수지 방수로의 중간 지점에 있다. 날씨만 흐려도 보에 물이 불어난다 하여 구름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까고당(加古堂):까꼬당못:까꾸댕이못:가고지(池)
직동리 감내 서북쪽에 있는 못이다. ‘가(加)‘는 가(邊) 또는 갓(邊)의 차자(借子)이다. ‘고(古)‘는 곳(處·庫)의 대자로 보인다. 평리(平里)의 고중(庫中)은 점마을(店村)로서 이러한 특수산업지를 곳(處·庫)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古)는 곳(庫)의 대자이다. 웅촌면 고연리의 고야(古也) 마을도 지소(紙所)로 말미암아 생긴 이름이어서 ‘古‘ 가 붙은 것이다. 당(堂)은 그 어원을 ‘ ‘에 둔 것인데, 이는 골(谷)의 고훈(古訓)이며 그 차자로 쓴 것이 堂·呑·頓·芚·丹 등이다.
그러므로 까고당(加古堂)은 곳마을의 갓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다. 이 가고당은 옛 기록에도 나타난다. 이 곳에 있는 못을 가고당못이라 한다. 신화(新華)의 새터(新基)에 있다.
남동(南洞)
직동리의 웃관정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중북면사무소의 남쪽이므로로 남동이라 하였다.
돈박고개
직동리의 옛 고개로 돈박골이라고 부른다. 옛 읍성(邑成)의 동문 밖이라는 말이다. ‘동문밖‘이 변하여 ‘돈박‘이 된 것이다. 언양읍성의 동문은 망월루(望月樓)라 하였다.
때집걸
직동리 산 482-1번지에 해당된다. 옛날에 띠(茅)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은 집이 두 채 있었기 때문에 이 인근을 때집걸이라 불러왔다. ‘때‘는 ‘띠‘의 방언, ‘걸‘은 ‘거리‘의 준말이다.
새각당:신리(新里):수문솔배기
직동리의 전거리 남쪽에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솔을 심은 곳이라 하여 수문솔배기라 하였다. ‘수문‘은 ‘심은(심다)‘의 방언, ‘배기‘는 박다 또는 박이다라는 말이다. 장승을 박았던 곳을 장승배기, 기(旗)을 꽂은 재를 기배기재(嶺), 화짓대 박은 자리를 화짓대배기라 한다.
한편으로, 수문솔배기를 새각단이라 부른다. 새로 된 마을이란 뜻이다. 각단은 마을을 의미하는 말이다.
새마을
직동리에 수년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이룩된 새로운 마을이다. 추성못(秋成池)의 서쪽 구릉지에 조성된 문화주택촌이다.
새터:신기(新基)
직동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한다. 새로 이룩된 마을에는 새터·신기·새마을·새말·신평(新坪) 등의 이름이 많이 붙여지고 있다.
샘골못
직동리 신흥의 고등골에 있는 못이다. 샘이 있어서 샘골이라 부르는 곳에 축조한 못이므로 샘골못이라 한다.
신화(新華)
직동리의 행정마을이다. 신화는 새터와 새각단 등의 새로 된 마을들을 아화(雅化)한 행정마을 이름이다. 전거리·새터·새각단·관정 등 자연마을이 따로 있다.
신흥(新興)
직동리 두 행정마을의 하나이다. 새마을의 의미를 가진 마을 이름이다. 새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새마을·와골·고등골·감천(坎川)·돈박고개·진다리골 등 자연마을이 따로 있다. 직동리 181-1(전) 일대에서 토기 등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와골:와곡(瓦谷):외골
직동리의 고등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기와를 굽던 기와막이 있었다.
장솔배기
직동리의 250번지 일대에 있는 산이다. 솔을 빽빽히 심어 키웠다 하여 장솔배기라 부른다. 1960년대에 와서 개간하여 고속도로와 택지로 변하였다.
전(田)거리:정거리
직동리 새각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평리의 점달 어귀에 해당한다. 앞뒤로 밭이 많기 때문에 전거리라 한다.
추성못(秋成池)
직동리 고등골 서쪽에 있는 못이다. 추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면서 권세를 부리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고, 그의 집자리를 파서 만든 못이라는 설화가 있다. 예종 때 추성제(秋成堤)라 하여 송도리(松道里-지금의 松臺)에 속해 있었다.
화랑바위(花郞岩), 화랑바위골
직동리 갓비알산 북쪽의 정상에 있었던 바위이다. 신라 때 화랑들이 찾아와서 놀았다 하여 화랑바위라 불렀다. 가운데에 2.5m가량의 높은 바위가 있고, 그 둘레에 4∼5m 간격으로 낮은 바위가 둘러싸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 같았다 한다. 1974년에 송전철탑을 세우면서 이 바위를 깨뜨려 석축 자재로 사용하고 말았다. 화랑바위에서 동북쪽으로 늘어진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곳을 화랑바위골이라 한다.

태기리(台機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예종 때는 옹곡리(瓮谷里)라 한 마을이다. 언양군 중북면에 속하였다. 정조 때는 대곡리와 직동리에 속했다가, 1894년(고종 31)에는 직동리에 속한 듯하다. 1911년에는 기지동(機池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태동(台洞)의 전부와 기지동(機池洞) 일부를 합하고, 태동의 태(台)와 기지의 기(機)를 따서 태기리라 하였다. 행정마을로 태기 마을 하나만 있다.
가매등
태기리의 옹태와 틀못산에 걸쳐있는 산등이다. 등(嶝)의 생긴 꼴이 가마같다 하여 가매둥이라 부른다.
기목골
태기리 모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귀목(홰나무)이 있었다 한다.
기지(機池):틀모산:태기(台機):아릿말
원래의 이름 기제(틀못:機堤)에서 유래되었다. 못 이름을 틀못이라 한 것은 틀모산 김씨가 팠기 때문이라 한다. 예종 때 벌써 이 이름이 나타난다.
깨박골:개박골
태기리 틀못 동쪽 골짜기로 지형이 개의 밥그릇처럼 생겼다.
두래등
태기리 옹태에 있는 등성이이다. 일부는 사연제에 수몰되어 볼 수 없다. 산등의 형상이 둥글다 하여 두래등이라 부른다.
물래장골
태기리 옹태에 있었던 골짜기이다. 물이 폭포가 되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물배기골이라고도 한다. 폭포의 높이 3m가 넘었으나 지금은 사연제에 수몰되었다.
방아등
태기리 옹태에 있는 산등이다. 산등(嶝)의 생김새가 마치 방아처럼 생겼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옹태의 수몰된 집이 이 곳으로 옮겨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백마곡(白馬谷):백마골, 백마등(白馬峙)
태기(台機)에 있는 골짜기와 산등이다. 태기리의 산 212번지 일대의 골짜기인데,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마골이라 한다. 틀모산 김씨의 묘가 이 산에 있다. 묘가 2기 있을 때까지는 틀모산에서 그들이 부자로 살았으나, 3기를 들이고 난 뒤부터는 후손들이 쇠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범골
태기리의 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풍수지리상 호두혈(虎頭穴:범의 머리)에 해당된다 한다.
빽대만딩이
태기리 틀못 북쪽에 있는 높이 162m의 산이다. 옛날에 세부측량을 위해 측량 푯대를 세웠다. ‘푯대=빽대‘가 되었다.
사기(沙器)디미
태기리 옹태에 있는 더미로 옛날에 사기그릇을 만들었다. 디미는 더미로서 흙더미, 산더미와 같은 말로 쓰인다.
산막골
태기리 배나뭇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병든 소를 격리시키기 위해서 막을 지어놓은 곳이었다 한다.
새이집골
태기리 기목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상여집이 있었다. 울산 방언에 따라 ‘상여=새이‘가 되었다.
옹태(甕台):웃옹태
태기리의 마을로서 태동(台洞)이라고도 한다. 지명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을의 지형이 독처럼 생겼다 하여 옹태라 부르고, 또 옹기를 구운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세 골(谷)의 물이 흘러와서 이 마을에서 합수되므로 삼태성(三台星)의 태(台)를 따서 태동(台洞)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옹태마을은 사연제 축조 때 전 마을이 수몰하여 철거되고 지금 있는 집들은 그 때 옮겨 세운 집이다. 그러나 옹태는 예종 때의 기록에 따르면 옹기점에서 유래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용두산(龍頭山)
옹태에 있는 작은 산이다. 생긴 모양이 용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용두산이라 부른다.
우막골(牛幕谷)
태기리의 탱장골 동쪽 골짜기이다. 옛날에 병든 소를 격리시키는 우막이 있었다 하여 우막골이라 부른다.
자래등
태기리 옹태에 속한 산등이로 일부가 사연제의 물 속에 잠겨있다. 이 등(嶝)의 생긴 모양이 자라 같다 하여 자래등이라 부른다.
탱장골:택정골
태기리 깨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자세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팽풍바우
태기리 깨박골에 있는 바위로 바위가 병풍처럼 생겼다.

평리(平里)
언양읍 15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옛날 언양군 중북면의 지역이었으며, 고종 때는 다개리에 딸린 마을이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다개리 일부를 합하여 평리라 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행정마을도 평리 하나로 되어 있다. 평리 425번지(임야) 일대에서 도굴된 석곽분 등 삼국시대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고중(庫中):점말
옛날부터 ‘점말(店村)‘로 알려져 온 곳이다. 조선시대 인화분청(印花粉靑)과 백토분청(白土粉靑)을 비롯한 사기와 옹기를 구워 오던 요지(窯址)가 있었다. 점말이라는 이름도 사기점(沙器店)이라 한 데서 유래됐다.
지금 요지는 다 농지로 개간되었으나 표토를 파면 그릇조각이 무수히 나온다.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여러 대에 걸쳐 도공(陶工)으로 일하던 공장(工匠)들의 후예라 한다.
옛 지명에 나오는 ‘고(庫)‘는 특수산업지를 지칭하는 ‘處·所‘를 ‘庫‘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이두(吏讀)로 ‘곳‘이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곳(處)‘은 군(郡)·현(縣)·향(鄕)·부곡(部曲) 다음가는 소부락의 칭호이다. 도자기소·염소(鹽所)·금은소(金銀所)·지소(紙所) 등이 그것이다. 이로 보아 고중(庫中)도 도자기소라 하는 곳(處)에서 나온 이두를 차자한 것이다. 이 곳에서 삼국시대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괴말·고지(庫旨)
평리의 평지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지를 사창(社倉)으로 인해 생긴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고중(庫中)과 같이 도자기소의 ‘處(곳)‘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인다. ‘괴말‘은 ‘고(庫)의 마을‘의 준말, 지(旨)는 우리말 ‘티‘의 차자(借字)이니, 이는 고원(高原)의 뜻이 된다.
구터(舊-)
평리의 괴말 서쪽에 있는 버덩이다. 옛날에 마을이 있었던 터라 한다.
돌정등
평리 점말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독을 만드는 점(店)이 있었다.
못안고개, 못안골
평리 점말 남쪽에서 직동리 까꾸당못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그 골짜기를 못안골이라 한다.

부정끼 또가리
평리의 장구배미 서쪽에 있는 논이다. 지형이 부정끼(살포)처럼 생겼다.
불썬방우
평리의 점말 서남쪽 산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 부녀자들이 불을 켜놓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점딧산
평리의 점말 뒷쪽에 있는 높이 203m의 산이다.
원평(原平)
평리(平里)의 본 마을을 원평(原平)이라 한다. 평리는 들마을이란 뜻이다.
황감(黃監):황금
평리의 괴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황대감이 살던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황감(黃監)못
옛날 황대감(黃大監)이 이 곳(황감:黃監)에 살았는데, 그 집 종이 상전을 죽여 파가저택(破家 澤)으로 못이 되어 황감못(黃監池)으로 전해 온다. 부모와 지아비를 죽인 자, 종으로서 주인을 죽인 자, 관노로서 관장을 죽인 자 등은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 하여 처자는 종으로 삼고, 집을 헐어 못을 만들었다. 황감못은 윗못과 아랫못이 있다.